2009·03·25 00:35 | HIT : 4,315 | VOTE : 365 [뉴욕일보] [시로 여는 세상]
꽃이 피는 시간
정끝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 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마저 갈 수 있겠다 ------------------------- 꽃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닌 것! 목숨 튿어지는 것에는 내부의 시간마다 제 각각 다른 시간과 빛깔과 나름의 의지적 깜냥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일찍 피거나 늦게 피거나 뒤거나 앞이거나 꽃들은 치열한 개별적 존재 의지를 가지고 개화하는 것이다. 왜 아닌가. 꽃이 피는 일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것이며, 인간 또한 꽃과 다르지 않은 것. 이제 꽃 피는 계절이다. '이제 피었으니/가던 길마저 갈 수 있겠다'
정끝별 시인은 전남 나주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1988년『문학사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시론집 및 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여행산문집 <여운> <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시선 평론집 <시가 말을 걸어요> 등이 있으며,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 <신지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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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일보』-2009년 3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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