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23 03:29 | HIT : 4,227 | VOTE : 374
[시로 여는 세상]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이재훈
* 침묵도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제 호흡의 표징 몇 자를 남깁니다. *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통각이 없는 시간들. 모든 사물은 그저 멀리 있는 상징일 뿐입니다. * 요즘은 하루에도 수백 번 씩 제 존재가 바뀝니다. 때론 동물이었다가 때론 식물이고 때론 명징했다가 때론 무질서합니다. 나 또한 상징에 불과합니다. * 바깥은 너무 빨라서 자꾸 안에만 있게 됩니다.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이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내 걸음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술에 취해 찡그린 제 얼굴이 당신의 기억에 남을까 염려됩니다. *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과 위선에 대해 번민합니다. 별은 늘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 그동안 숨어 있던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집니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내 살들이 냄새를 풍기며 날아갑니다. 비린내가 가득 합니다. --------------------------- 이 심화(心畵)가 아름답다. 내면 의식의 흐름이 선명하게 무늬를 그린다. 존재가 흘러가는 마음의 향방이나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지'는 것을 여기선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감각의 속곳을 열고 들여다보는 기쁨이 여기 있질 않은가. 이재훈 시인은 강원 영월 출생. 199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가 있으며, 현재 [현대시] 편집장, [시와 세계] 편집위원이며, 중앙대와 건양대에서 강의함. 『뉴욕일보』2009년 5월 18일자(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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