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9 00:49 | HIT : 4,236 | VOTE : 383 [시로 여는 세상]
연암을 필사하다 서안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넜다 젖은 말 잔등에 올라앉아 연암의 뒤를 따라간다 연암의 두려운 눈동자와 시끄러운 귀를 지나 내 손가락들이 먼저 강물에 젖는다 젖은 필체 끝에서 쏟아져 내리는 시뻘건 강물 사나운 강물을 가로 지르는 사이 소란스러운 마음은 강을 쉽사리 건너지 못하고 있다 젖지 않는 것들은 생각 뿐이며 젖는 것 또한 생각 뿐이라고 연암이 말을 건넨다
전화 속 친구의 목소리는 혀가 풀려있었다 친구의 뺨을 세게 때렸다 내 몸이 다 얼얼했다 친구를 짐짝처럼 택시에 구겨넣었다 응급실에서 그녀가 뱉어내는 한 주먹의 수면제와 알약들이 상처처럼 퉁퉁 불어있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몸을 삼아* 연암은 자신을 아홉 번 건넜지만 하룻밤에 나는 나를 천 번이나 건넌 적이 있다 건널 때마다 내 몸으로 흘러드는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허우적거리던 친구 손아귀의 힘 힘줄처럼 뻗어간다
내 눈귀가 너무 소란스럽다 연암이 이국의 낯선 강을 건너고 있다
*박지원(朴趾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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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삶은 연암이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듯이 아니, 천 번도 더 도강했을 바로 그 난황의 인생살이 아닌가. 투전판과 다름없는 이승에서 생에 탈진한 목숨들이 제 목숨의 고삐를 쥐고 도강해야 하는 것, 그럼에도 불온한 밤들을 헤아리며 혼자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어찌 이 시의 절절한 생의 물살에 저절로 마음이 흥건하게 젖어들지 않겠는가. 서안나 시인은 1990년『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1991년『제주한라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등이 있다. <신지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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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일보] 2008년.11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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