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08 12:48 | HIT : 4,383 | VOTE : 385
[시로 여는 세상] 귀명창
장석주
마당 가장자리에 풀들이 무성하다. 바랭이, 명아주, 달맞이꽃, 강아지풀, 쇠뜨기, 비름, 환삼덩굴들이 연합전선을 펼치며 마당을 노리고 있다. 며칠을 소강상태로 관망하는데, 풀들의 기세가 등등하다. 마침내 풀들의 침공이다. 정토 습격이다. 맹하 대공세다. 이 영토 분쟁에 휘말린 나는 땡볕 아래서 풀을 벤다. 백병전이다. 적들의 저항은 미약했다. 손과 팔등을 약간 긁혔을 뿐. 낫에 베여 넘어진 희생자들을 거둬 한쪽에 쌓는데, 풀 비린내가 진동한다. 승리를 낙관했으나 오판이다. 오산이었다. 비 온 뒤 풀들이 일어섰다. 풀들은 다시 마당을 호시탐탐 노렸다. 풀들은 다시 일어섰다. 나도 또다시 낫을 들었다. 풀은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쓰러진다. 여름 내내 전쟁을 치르며 나는 지쳐갔다. 무법한 환삼덩굴이 허공을 더듬으며 마당의 정세를 염탐한다. 달맞이꽃 포병들이 펑펑 노란꽃망울 대포를 쏘았다. 쇠뜨기 보병들이 인해전술로 밀고 온다. 저 밀려오는 푸른 것들의 공세를 이길 수는 없다. 저 맹렬함에 나는 굴복한다. 패전의 침울함으로 어둠이 마당을 밟을 때, 풀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 풀들이 울다니! 나는 귀명창인 듯 엎드려 귀를 내놓고 풀들의 초록 언어로 된 시를 엿듣는다. 풀들이 운다. 풀들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전면적으로 밀며 온다. 섬돌에 서서 풀들의 명음(名吟)이나 들으며 여름을 난다. 나는 기어코 귀명창이 되겠다! ------------------- 누가 풀들이 그저 무감각한 생물이라 할 것인가. 이 시가 '풀들의 명음(名吟))'을 들려준다. 귀명창이라니, 곧 자연의 참 본성과 융화되는 경지 아니겠는가. 치열하고 끈질긴 풀들의 생명력과 강인한 생존력이야말로 대자연의 강력 에너지이며 원동력인 것. 이 시는 그 풀들의 울음소리가 곧 시라 한다. 그것 또한 생명의 큰 울림 아니랴. 이 시가 풀빛처럼 사방 넉넉하고 푸르러진다. 장석주 시인은 충남 논산 출생. 월간문학(1975)[조선일보] 신춘문예(1979)로 등단, 시집으로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붉디 붉은 호랑이> <햇빛사냥><절벽> 및, 시선집<꿈에 씻긴 눈썹> 및 다수 산문집, 평론집등이 있다. <신지혜.시인>www.goodpoem.net
-뉴욕일보.2008년 8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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