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일보<시로 여는 세상>

제목[뉴욕일보]<시로 여는 세상>말(言語)을 타고 평생을 간다/한혜영.2019-07-2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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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1 13:08 | HIT : 5,275 | VOTE : 676



[시로 여는 세상]

 

 

말(言語)을 타고 평생을 간다

 

한혜영

 



인생을 부리는 것은 9할 9푼이 말(言語)이다 자다가도, 죽음 직전에도 말 잔등에 올라야 한다 죽겠다는 말은 그래서 함부로 할 게 아니다 말 때문에 다 저녁때 끄덕끄덕 사막으로 들기도 하고 감옥이나 찻집엘 가기도 한다 가벼운 농담이라도 함부로 하지 마라 밥이나 술 산다는 약속조차도, 사랑한다는 농담 한마디 잘못한 배우 날뛰는 악몽에 머리끄덩이 잡혀 밤새 혼나는 것도 봤다 불가능이라고는 없던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한 것은 말 달릴 때를 놓친 게 원인이다 말은 눈도 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제몸에 입력된 정보대로 귓속을 향해 돌진할 뿐, 권력이나 비밀을 가진 자는 더 조심스럽게 말을 몰아야 한다 내 말(馬)이든 네 말(馬)이든 말굽에는 요란한 편자가 있으므로, 가다가 말이 말을 만나면 교미를 해서 눈덩어리처럼 거대한 말을 중도에 낳기도 한다 말 잔등에서 엉덩방아 크게 찧을 때는 대부분이 이런 때이다 누군가의 말이 내게로 오거나 아니면 내 말이 어딘가로 가거나 평생 말에서 말로 곡예사처럼 옮겨 타다가 끝마치는 것이 인생이다 별 것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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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가 말의 大道를 일깨운다. 이 세상은 말잔치, 말들의 세상 아닌가. 언어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동물인 말(馬)과 언어의 말(言語)은 동음이의어이지만 이 시에선 그 중의적 의미를 직방으로 꿰뚫는다. 자신이 내놓는 말에 의하여 이렇게 저렇게 난공불락의 지경에 처하기도 하고 ‘눈덩이처럼’ 일파만파 번지기도 하는 말의 속성, 그러므로 말에 대한 책임과 지혜로운 말부림의 言道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이 시가 명징하고 서늘하게 삶의 철학을 짚어 준다.

 한혜영 시인은 충남 서산 출생. 1994년『현대시학』및 1996년 《중앙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뱀 잡는 여자》가 있으며, 장편소설 《된장 끓이는 여자》, 동화《팽이꽃>《뉴욕으로 가는 기차》《비밀의 계단》《붉은 하늘》《날마다 택시 타는 아이》《이민 간 진돌이》등이 있으며, 계몽문학상, 시조월드문학대상, 미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지혜<시인>

 

『뉴욕일보』2010. 4월 19일자(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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