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23 13:56 | HIT : 4,865 | VOTE : 444
[시로 여는 세상]
자두
이상국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 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 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 왜 아닌가. 이 시가 가슴 찡한 감동을 준다. 바로 우리의 가족들 모습이다. 가난한 시절, 끼니를 굶던 시절, 대식구가 굴비엮음처럼 엮여서 자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리하여 진학을 할 수 없거나 혹은 일가족의 몇이 선택되어 겨우 공부하고 나머지 자녀들은 진학을 접고 일터에서 뼈아픈 설움을 찍어내던 때가 있었다. 가난의 쓰라린 슬픔을 겪은 자만이 낮은 것들의 신음을 이해하고 상처난 세상을 저토록 따스하게 위무해 주는 것 아닌가. 이 시의 잔잔한 물결이 온종일 가슴을 철썩인다. 이상국 시인은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동해별곡><우리는 읍으로 간다><집은 아직 따뜻하다><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등이 있으며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수상등을 수상했다.<신지혜.시인>
<뉴욕일보>2008년 4월 21일(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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