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2 02:07 | HIT : 4,229 | VOTE : 372
[시로 여는 세상] 수저 이규리 아이가 두 시간째 주방에서 달그락거리고 있다 몸져누워 먼 세상일인 듯 듣는 아득히 낯선 소리 서툴게 부딪는 숟가락 소리, 살아있다는 건 누워서 듣는 달그락거리는 수저소리 쯤 될까 죽은 후에도 저 하나쯤 가져가고 싶은 소리 숨이 끊어진 뒤에 마지막까지 남는 건 청각이라는데 문득, 아버진 무슨 소릴 가져갔을까 궁금하다 호흡기 떼기도 전에, 글쎄, 시트 밑에서 통장이 여섯 개나 나왔는데 우리도 모르는 통장이, 관리는 누가 하냐 첫째는 멀리 있어 안 되고 둘째는 좀 불안하고, 너는 생전에 아버지 애 먹여서 안 되고, 아버지의 일생을 가볍게 들었다 놨다, 마지막까지 통장통장 하던 소리, 육남매 덜걱대는 소리, 태어나서 시작되고 죽을 때 거두어가는 게 수저소리일 텐데 그 소리 대신,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통장을 다 가져가신 셈이다
------------------- 수저 소리가 눈물겹다. 날마다 수저를 들었다가 놓는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살아있음을 가장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는 일 아니던가. 각양각색 삶의 부딪침과 파편들 속에서 치열한 생존력이 그의 삶을 지탱해 주었을 터. 죽음 후엔 자신이 쌓은 행적의 편린들과 행업이 후기처럼 남을 것이나, 모든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다.죽음에 이르러 우리가 가져갈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규리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뒷모습> 등이 있다. <신지혜. 시인> 『뉴욕일보』2009년 3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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