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31 01:09 | HIT : 4,362 | VOTE : 347
『뉴욕일보』 [시로 여는 세상]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이선영
이 작은 포도알 속에도 몇 개의 딱딱한 씨가 들어 있다
이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 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인 양 씨가 들어있다 입안에서 터지는 이 부드러운 포도알 속에도 그냥은 삼킬 수 없는 응어리라는 듯 씨가 맺혀 있다 이 달콤한 포도알을 굴리거나 누르며 지그시 씹을 때도 절로 생겨나 거저 여물 리 있겠느냐는 듯 난자이며 정자인 씨가 혀에 걸린다 손길만 닿으면 건들건들 떨어져내리는 포도알 하나에도 돌부리처럼 걸려 넘어지는 옥니박이 씨가 숨어 있구나!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 다닥다닥 열린 포도송이, 그 속에 하나씩 박혀있는 씨앗을 우리는 무심코 뱉어버린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 '포도알이 포도씨를 꼭 물고 있'는 눈물겨운 정황을 우리는 마주한다. 그 작은 포도알속에서도 씨앗이라는 아픈 이름으로 견디어내며 여물고 있었다니! 이 씨앗의 견딤, 그리고 무른 살을 다 허물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남은 채, 미래의 결정이 된 것이다. 생명의 경이와 존재의 감격적인 실상의 세계가 이렇게 선연하기만 하다. 이선영 시인은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오, 가엾은 비눗갑들><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평범에 바치다><일찍 늙으매 꽃꿈><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등이 있으며, 현 이화여대에 출강.
<신지혜. 시인> 『뉴욕일보』<시로 여는 세상>2009년 7월 27일(월요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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