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31 15:31 | HIT : 4,239 | VOTE : 383
[뉴욕일보] <시로 여는 세상> 주산지 왕버들
반칠환 누군들 젖지 않은 생이 있으려마는 150년 동안 무릎 밑이 말라본 적이 없습니다 피안은 발 몇 걸음 밖에서 손짓하는데 나는 평생을 건너도 내 슬픔을 다 건널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은 왜 낙타로 하여금 평생 마른 사막을 걷도록 하시고, 저로 하여금 물의 감옥에 들게 하신 걸까요 젊은 날, 분노는 나의 우듬지를 썩게 하고 절망은 발가락이 문드러지게 했지만, 이제 겨우 사막과 물이 둘이 아님을 압니다 이곳에도 봄이 오면 나는 꽃을 피우고 물새들이 내 어깨에 날아와 앉습니다 이제 피안을 지척에 두고도 오르지 않는 것은 나의 슬픔이 나의 꽃인 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주산지는 조선 숙종때 시작하여 경종때 완공된 저수지 이름이다. 이곳에서 150년간 물 속에 잠겨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주는 나무가 있다. 바로 왕버들 나무다. 물 속에 뿌리를 디딘 채 '물의 감옥'에서의 천형 같은 감내와 슬픔을 겪으며 버텨내야 하는 이 나무의 생애란 참으로 애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인간의 슬픔 역시 왕버들의 생과 다르지 않은 것, 번뇌 가득한 뼈아픈 슬픔이 결국 생의 꽃임을 관조하는 이 시는 아픈 생의 상처를 가만가만 어루만져주고 있다. 반칠환 시인은 충북 청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9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누나야>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등 다수가 있으며, 서라벌문학상을 수상했다.
<신지혜. 시인> 『뉴욕일보』<시로 여는 세상>2009년 8월 31일(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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