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시와의대화>

제목[뉴욕중앙일보] <시와의 대화> 맡겨둔 것이 많다/정진규2019-07-18 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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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31 12:57 | HIT : 7,682 | VOTE : 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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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의 대화] 맡겨둔 것이 많다  





맡겨둔 것이 많다

정 진 규



세탁소에 맡겨두고 찾지 못한 옷들이 꽤 여러 벌 된다 잊고 있다가 분실하고 말았다 스스로 떠나기도 했다 지금은 누구 몸을 입히고 열심히 낡아가고 있을까 내 길이 아닌 남의 길 어디쯤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나다니고 있을까 그것들 말고도 내게는 맡겨둔 것이 많다 몇 해 전 일본 가고시마 공항 보관소에 맡겨 두고 온 라면 집 여자의 눈물도 있다 맡겨둔 것이 많다 지지난해엔 내 아버지마저 하늘나라에 맡겨 드렸다 어머니는 훨씬 오래 전 30년이 넘었다 나는 어느 것도 버리지 못한 채 유보의 짐을 지고 기다리라고 기다리라고 늑장을 부리고 있다 내 삶의 후반부가 더욱 더디다 꼬리가 길다 오늘도 기다리다 지쳐 삼삼오오 스스로 길 떠나고 있는 뒷등들 아득히 바라보면서도 나는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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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시인



이 시는 이별의 심연을 꿰뚫어보며 통찰한다. 여기서 세탁소에 맡긴 내 옷이란, 내 인간적인 체취와 따뜻한 숨결이 흠씬 배어있는 것을 말한다. 그 옷은 나를 입히고 한 피부를 이루었던 그런 훈훈한 연을 가졌던 옷이다. 그러나 잠시 잊고 있는 사이, 분실해버린 그 옷은 이제 어디서 다른 이의 몸을 입히고 낡아갈 지도 모를 일.

그러나 어디 그 옷 뿐이겠는가. 옷은 곧 이별의 상징적 모습이다. 시인과 닿았던 인연들이 떠나감으로써 시인을 실로 적막하게 한다. 일본 가고시마 공항의 보관소에 맡겨둔 라면집 여자의 눈물과, 30년 전의 어머니 그리고 몇 해 전 아버지마저 모두 하늘나라에 맡겨드렸다고 한다. 시인은 그 같은 슬픔들을 모두 맡겨둔 것이 많다고 역설함으로써 독보적인 묘파의 시각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 모두가 살아간다는 일은 아픈 존재를 저편에 하나씩 맡겨두는 일인 것이다. 떠난 인연들이 내 자아와의 상관관계를 벗어버린 채 저편에 남아있으나 그 인연의 고리는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남아 있는 자와 떠나간 자의 원거리를 새롭고 신선한 시각의 화해와 교통의 교각을 놓아줌으로서 그 부신 슬픔들이 본연적 채무로 더욱 단단히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의 오랜 道를 지나온 통찰적 사유속엔, 경도 높고 독특한 큰 내공이 내재한다. 또한 이 산문시의 연쇄적인 탄력이 독자의 시선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잔잔한 대양의 물결이 그득히 번뜩이는, 시의 또다른 고감도의 사유의 바다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정진규 시인은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마른 수수깡의 평화><本色>외, 다수의 시집 및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입력시간 :2004.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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