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시와의대화>

제목[뉴욕중앙일보] <시와의 대화> 제37번-비가/김춘수2019-07-18 19: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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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31 13:03 | HIT : 7,758 | VOTE :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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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의 대화> 제37번-비가  






제37번비가(悲歌)



김춘수



너는 이제 투명체다.

너무 훤해서 보이지 않는다.

눈이 멀어진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산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너는 벌써

억만 년 저쪽에 가 있다.

무슨 수로

무슨 날개를 달고 나는

너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까.

주먹만한 침묵 하나가

날마다 날마다 고막을 때린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가도 가도 그대로의 허허벌판이다.

밤도 없고 낮도 없다.





*****

신지혜

시인



이 시는 '쉰 한편의 비가' 연작시 중에서 제37번비가(悲歌)다.

이 비가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연민과 비애감을 노래한 투명하면서도 슬픈 시다.

그 적막감이 너무나도 쓸쓸하여 이 가을을 통째로 빠져나가는 듯한 슬픔이 시편에 아릿하게 묻어난다. 홀로 남은 자로서의 존재론적 허무와 단절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의 결별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허망한 상실감이 아프게 변주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은 말 그대로 무의미하며 적막일 뿐. 무엇이 빛나는 의미가 되어줄 것인가. 시인은 '가도 가도 그대로의 벌판'과 '밤도 없고 낮도 없다'라고 안타까이 슬픔의 심연을 투사한다. 마치 썰물이 다 빠져나간 갯벌 위에 혼자 선 것처럼 존재의 빈자리를 그대로 치고 나가는 그 사랑의 이름 하나는 홀로 남은 자에게 깊고도 투명한 침묵 하나를 덩그마니 남기고 있다.

'꽃'의 시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시인은 모더니즘을 추구하면서 우리 문단사에 관념을 배제한 '무의미시'를 주창하여 실험함으로써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최근 갑작스러운 기도 폐색으로 인해 의식불명으로 장기간 입원 중이어서 많은 문학인들의 마음을 몹시 안타깝게 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통영 출생.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 '꽃의 소묘' '처용단장' '거울속의 천사' '쉰한 편의 비가' 및 다수 시집과 다수 시론집들이 있다.
 
입력시간 :200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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