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시와의대화>

제목[뉴욕중앙일보] <시와의 대화> 꺾인 곳에 머물다/권애숙2019-07-1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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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31 13:00 | HIT : 8,296 | VOTE :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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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의 대화> 꺾인 곳에 머물다  





꺾인 곳에 머물다



권애숙



큰길로 가기 위해 골목을 돌아 내려가다 보면

거기 무릎관절처럼 안으로 꺾여 움푹,

구덩이 하나 패여 있다

잠시 툴툴거리다 누구는 돌아가기도 하고

훌쩍, 주춤거리던 발길 뛰어넘기도 하고

혹은 저벅저벅 흙탕물 튀기며 건너기도 하는 곳



꺾인 곳에선 가끔 생살 찢긴 상처가 생겨 있고

사람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서거나 보폭을 좁히며

머뭇거리던 발길 고쳐 잡는다



한참을 가장자리가 헐어있는 물웅덩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관절 어딘가에도 아마 저런 진물자리 하나씩

패여 바삐 길 떠나는 내 걸음걸이 조금씩

잡아당기고 있을 것 같다

상처가 변형시키는 힘



오늘도 나는 등을 치는 세상에 휘청, 꺾이고

칭얼거리는 내 사랑에 푹, 꺾이고

꺾이는 내게 또 한풀 꺾였다

조금 느슨해지며

조금 골똘해지며

조금 크르릉거리는 사이

뿌리에서 뽑아올린 송진 같은 생각 뭉글뭉글 터를 잡아

새길을 만들어주는 꺾인 자리의 튼튼함이라니

그래서 나는 무엇엔가 자주 꺾이고 꺾인 곳에 머물러

새살의 향기 오래 맡고 있다



***

신지혜

시인



한때, 꺾인 곳이 몹시 시리고 아픈 적이 있는가.

그러나 그 꺾인 곳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발아하는 새살의 자리라고 이 시는 말한다.

‘생살 찢긴 상처’ 혹은 ‘가장자리가 헐어있는 물웅덩이’ 그런 예기치 못한 행로들로 일변하는 것이 곧 삶이지만, 꺾인 곳에서 뭉글뭉글 송진처럼 터를 잡아 새길을 만들어 주는 힘은, 우리에게 이 얼마나 따뜻한 치유의 힘을 안겨 주는가.

느닷없이 휘청거리게 만들고야 마는 그 대상들이 우리 마음과 영혼을 다치게 하고 슬픔과 낙망에 무릎을 접질리게 한다. 그러나 그 상처의 힘들이 ‘새 길을 만들어주는 꺾인 자리의 튼튼함’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 시는 따뜻한 희망과 낙관으로, 지상의 아픈 숨통을 틔워준다. 꺾인 곳이야말로 푸릇푸릇한 새로운 발아의 자리가 아닌가. 그곳에서 돋아오르는 새살의 향기에, 어느새 마음이 위무된다.



권애숙 시인은 경북 선산 출생. ‘시문학’(1993) ‘부산일보’ 신춘문예시조 당선(1994) 및 ‘현대시’(1995)가 추천되었으며, 시집으로 ‘차가운 등뼈 하나로’ ‘카툰세상’ 등이 있다.
 
입력시간 :2004.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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