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사슴
이경림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질기게 견디면
나무 둥지 속에 염통이 생기고
쓸개가 생기고
고요히 흐르던 연둣빛 수액이
뛰노는 붉은 핏물이 되는 걸까
얼마나 멍하니
얼마나 머엉하니, 기다리면
수십년 붙박혔던 뿌리가
저리 겅중거리는 발이 되는 것일까
아직 나무였던 시간들이 온 몸에 무늬로 남아있는데
제 몸이 짐승이 된 줄도 모르고
자꾸 허공으로 가지를 뻗는 철없는 우듬지를 그대로 인 채
저 순한 눈매의
나무가
한 그루 사슴이 되기까지는
************
신 지 혜
시인
환상적이며 아름답다.
고대의 신화적 나무 한그루를 연상해본다. 더욱이 사슴이 된 나무의 모습은 얼마나 또 아름다운가. 나무가 얼마나 오래 질기게 견디었으면 사슴이 되어서 피가 흐르고 겅중거리는 발이 되는 것일까. 라고 시인은 말한다. 즉 살아있는 나무의 식물성의 고정관념을 완벽히 뒤집어 동물성으로 유추하여 인식함은 과연 어느누구가 예측 가능하겠는가.
이시는 파격적인, 독특한 상상의 일침을 놓는 아름다운 시다. 남달리 예리한 시인의 눈으로서만 가능한 시선이 아닌가. 이시의 행간엔 생동적인 혈맥이 뛰고 뼈와 근육이 살아있으며 나무의 눈매는 사슴처럼 고요한 깊이를 가졌다. 한 마리의 사슴을 만나게 되는 신비적인 마력이 시 구절구절마다 배여있어, 아름다운 시간대를 훌쩍 뛰어넘어 어느사이 감각적인 전설과 새로운 신화의 완전한 혼융을 맛보게 한다.
이경림 시인은 경북 문경 출생. '문학과 비평'(1989)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토씨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이 있다. 산문집'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및, 시평집'울어라 내안의 높고 낮은 파이프'등이 있다.
<뉴욕중앙일보>2005.0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