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중앙일보<시와 함께>

제목[미주중앙일보]<시와함께>음악들-박정대2019-07-19 00:42:48
작성자
2006·09·04 12:11 | HIT : 3,623 | VOTE : 244

[미주중앙일보]<시와함께>음악들-박정대

음악들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
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
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
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
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 데 아무도 침범하
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
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울 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
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
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
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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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시인



 이 시는 왜, 아름다운가. 아릿하게 저며오는 것인가.영원히 썩
지 않는 인간의 심성으로 썩지않도록 빚어내는 것이 곧 시라는
장르임을 다시한번 각성케 한다. 우울한 아름다움과 끝없는 방
황과 번민하는 자로서의 순수한 감정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면,
그리고 아직도 눈이 내리는 우리 청춘의 격렬 비열도를 그려본
다면, 이 시는 바로 그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
랑을 현실의 문전에 옮겨다 준다. 추억과 몽환이 슬프도록 아릿
해지는 그곳으로. 가공의 조합으로 윤택해진 현실의 물질문명과,
메마른 기교와 정신 분열적인 도해로 건조한 시를 남발하는 시
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더우기 낭만과 서정이 빛바랜 고답으로
지적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왜 유적처럼 깊이 새겨지는
가. 우리는 여기서 한 영상을 만난다.

 충남 태안반도 끝의 무인 열도인 격렬비열도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반대편 먼 산뚱반도에선 겨울밤이 위구르, 위구르 달려
온다. 그리고 불면의 밤을 몰아치는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
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음악같은 눈이 내린다.
이제 11월의 겨울 입구에서 눈내리는 격렬비열도의 영상과 음
악을 마음에 담는다. 그곳에선 저물지 않아도 되는 청춘의 환상
과 더불어, 모든 떠나간 입맞춤들이 아직 남아있다. 촛불을 일렁
이듯 흔들리는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가 불멸의 이름으로 거기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시사철 그렇게 눈이 내리고 있
는 것이다.



시인은 1965년 강원도 정선 출생. 고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편들''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같은 눈이 내리지' 등이 있다.



<신지혜. 시인>



-[미주중앙일보].200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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