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시

제목빈집/ 신지혜------------------[현대시학]2008.1월호2019-07-15 21:09:05
작성자

2008·01·28 06:33 | HIT : 3,302

빈집


신지혜



볕 좋은 날, 외삼촌의 묘를 이장했다




영락없이 빈집이었다

그 오래된 빈집은 혼자 놀고 있었다

낡은 어둠 한묶음이 채 풀지않은 편지처럼 현관문에

단정히 꽂혀있었다.

가구를 다 빼낸 빈집이 이렇게 허허벌판 환할 수 있다니




낡은 벽 사이 쩍 갈라져 틈새에 무명 江이 생기고

안방 침대 밑 먼지들은 모든 생각을 멈춘 듯 조용했다

아직도 거실 탁자위엔 한때 페튜니아꽃을 담았던 어두운 꽃항아리,

거실 카펫트 구석, 납작 엎드린 100원, 혹은 500원짜리 동전들

녹슬었을까 대체 이것들은 녹이란 옷을 한번 입어보기나 했던 것일까

위대한 조형물 설치작가인 거미들은

마지막으로 사각 천정 모서리마다 조형물을 살뜰하게 디스플레이했다




이 집을, 평생 외투처럼 입고 살았던 목숨의

흔적과 무늬를 나 가만 더듬어본다

생전, 중앙시장 장터를 누비던 파 장사, 배추장사의 리어카가

얼핏 골목을 돌아갔는데




한 여름밤, 천둥 번개가 흘끔 들여다보았을 그 빈집, 나 오래 들여다보니

캄캄하게 소등된 빈집이 마치 허공을 잘 눌러 담은

골 깊은 항아리만 같았다




결무늬 삭아빠진 관속에서 빈집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인부들은 

무덤 가에 둘러앉아 아, 햇빛 차암 좋다! 마치 생전 처음

이 별위에서 서로 만나기라도 한 듯, 오늘이 새 것인 듯, 반갑게

서로가 쨍! 잔을 부딪치는 것이었다






-『현대시학』1월호-2008.

#신지혜 시인# 빈집/신지혜# 시# 현대시학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