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1 02:50 | HIT : 88 |
|
|
촛불의 전설
신지혜
느닷없이 정전이다
세상이 끊기자 낯설고 무서운 어둠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더듬더듬 켜다 남은 양초를 찾아 서둘러 성냥을 그었다
어둠이 부욱 찢겨지면서 사방 스파크가 일었다 촛불은 칼날을 갈더니 실내에 침입한 어둠 하나씩 베어 넘어뜨렸다 힘센 어둠이 가끔씩 저항하는지 촛불이 격렬하게 푸드득거렸다 어느 틈엔가 겁에 질린 적막은 방구석으로 몸을 피한 채 말없이 떨고 있었다
오, 나의 촛불은 전사처럼 위대했다 어둠들 하나 둘씩 항복하며 그에게 매달려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가 만들어준 노오란 타원형 막사 속에서 나 그의 펄럭이는 얼굴 우러러 경의를 표했다
그는 고대 어느 족장처럼 머리 위 깃털 나부끼며 내게 전설을 들려주었다 목숨걸고 부족을 지켜내었던 이야기, 집채만한 코뿔소를 피투성이로 넘어뜨린 이야기, 도둑처럼 몰래 침입한 가난들 멀리 내쫓은 이야기, 그가 들려주는 행운을 불러오는 주문 , 병마 물리치는 주술, 간절한 염원담은 진언까지 나 줄줄이 따라 외웠다 방구석의 적막도 어느새 다가와 내 무릎 위에 곤한 잠이 들었다
그가 내 뼈아픈 슬픔을 요람처럼 잔잔히 흔들어 주었다 삶이란 불시에 정전이 되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은 찰나이고 말고
나는 내 가난한 심지 활활 태워 그 전설 속으로 녹아들 때까지, 격전지 출전하는 전사처럼 그와 함께 맹렬히 타올랐다
2018.12월호 웹진 [시인광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