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도서정보
사람이라는 풍경을 그린 문인수의 시집
문인수의 일곱번째 시집『배꼽』. 불혹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로 데뷔한 이후 절제된 언어와 애잔한 감성으로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인 문인수가 2년 만에 펴낸 시집이다. 2007년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식당의자>를 비롯하여 총 59편의 시를 엄선하였다.
문인수의 시는 단아한 맛과 잔잔하고 깊은 여운을 지니고 있다. 또한 대상의 과거 시절을 그리워하기보다는, 현상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해 비루한 현재의 삶에도 활력이 있음을 끄집어낸다. 표제작인 <배꼽>은 그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은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과거를 돌아보면서도 미래의 풍경을 엿보고 제시한다.
이번 시집에서 문인수는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내는 사람을 노래하는 것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풍경을 노래하는 것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사람이라는 풍경의 절반은 축축한 그늘로 채워져 있으며, 시를 쓰는 일은 그런 그늘을 햇볕에 내어 말리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만이 절경이고, 절경만이 시가 된다고 말하는 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배꼽>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저자소개
문인수 시인
1945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1985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늪 이 늪에 젖듯이』(심상, 1986),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문학아카데미, 1990), 『뿔』(민음사, 1992) 『홰치는 산』(만인사, 1999), 『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배꼽』(창비, 2008) 이 있음. 1996년 제14회 대구문학상, 2000년 제11회 김달진문학상, 2003년 제3회 노작문학상, 2007년 제7회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
1부
꼭지 / 만금이 절창이다 / 중화리 / 서정춘 / 지네 - 서정춘전 / 벽화 / 경운기 소리 / 1주기, 경운기 소리 / 주산지 / 얼룩말 가죽 / 파냄새 / 비닐봉지 / 대숲
제2부 흉 가 / 줄서기 - 인도소풍 / 도다리 / 뻐꾸기 소리 / 식당의자 / 굿모닝 / 책임을 다하다 / 광장 한쪽이 환한 무덤이다 / 뫼얼산우회의 하루 / 바다 이홉 / 비둘기 / 배꼽 / 아마존 / 저수지 풍경 / 아프리카 / 도망자
제3부 수치포구 / 엉덩이 자국 / 녹음 / 골목 안 풍경 / 매미소리 / 봄 / 쇠똥구리 청년 / 다시 정선선 / 오백나한 중 애락존자의 저녁 / 헛간 서 있다 / 유원지의 밤 / 방, 방 / 없다
제4부 향 나무 옹달샘 / 막춤 / 미역섬 / 방주 / 이것이 날개다 / 동백 씹는 남자 / 눈보라는 흰털이다 / 저녁이면 가끔 / 오후 다섯시 - 고 박찬 시인 영전에 / 흰 머플러! - 시인 박찬, 여기 마음을 놓다 / 기린 / 조묵단전 - 탑 / 조묵단전 - 비녀뼈 / 낡은 피아노의 봄밤 / 흔들리는 무덤 / 송산서원에서 묻다 / 고모역의 낮달
해설 : 김양헌 -실존의 배꼽을 어루만지다
시인의 말 인간의 냄새 가득한 만금의 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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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무슨 유행가처럼 잠시 나타났다 휘발해버리는 이 시대에, 시공을 넘는 시의 파워가 갈수록 더욱 더 막강한 언어의 괴력을 지닌 그런 시집이 없을까? 꼭 한번은 읽지 않으면 안될 시집이 있다면 바로 이 시집이다. 사람이기에 사람냄새를 알아야 삶이 되고, 깨달음이 되는 그런 시퍼런 비늘이 퍼덕이는 절경의 이야기들 말이다.
이 시집은 사람 냄새 가득한 이 세상의 진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온, 저 근원적 입구인 <배꼽>이 있고, 제 생을 다 받아안고 사는 꼬부라진 독거노인<꼭지>이 있으며,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의 날개<이것이 날개다>가 있다. 장삼이사, 필부필녀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비애 또는 견딤으로서 조용해지고 환해지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저잣거리의 이 인간세계를 그린 진경이다.
우리앞의 생, 우리 앞의 시간만큼 값진 것이 또 있는가. 제각기 부여받은 시간을 사용하며, 이 지상을 견디는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보이는 세계의 그 주인공들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부처들일터. 이 시집엔, 그 군상들이 지은 지구의 얼굴이 담겨있는 것이다.
대해(大海)에 물방울이 없다면 대해자체도 없는 것, 한 사람의 비애적 삶과 고요함이 없다면 이 세계 또한 인간도 없으니, 이런 묘법세계가 또 있는가. 그러니 이 세상에 와서 웅크리고, 살 비비며 사는 이 풍경들이야 말로 가치있는 생생한 지상의 현주소이자, 인간의 역사와 궤적인 것, 문인수 시인은 그 예리하고 범상한 눈으로 우리가 발 담그고 사는 사바세계가 무엇인지, 궁구하고 성찰하게 한다. 또한 끝없이 비계위에서 묵묵히 벽화를 바르듯 이가시적인 세계의 실존도 그러함을 일깨워준다.
벽화
벽에, 씨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가 있다.
벽이 꽤 넓어서 종일 걸리겠다. 사내의 전신이,
전심전력이 지금 오른손에 몰렸다. 입 꽉 다문 사내의
깊은 속엔
저런 노하우가 두루마리처럼 길게 감긴 것일까. 흙손
을 움직일 때마다
굵직한 선이 쟁깃날을 물고 깨어나는 싱싱한 밭고랑
같다.
제 길 따라 시퍼렇게 풀려나온다. 뭘 그리는 것인지,
막막한 여백이 조금씩
움질, 움찔, 물러난다. 작업복 등짝을 적시는 땀처럼
벽에 번지는, 벽을 먹어들어가는 사내가 있다.
벽을 지우는, 혁신하는 사내가 있다.
벽에, 벽을 그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다시 꽉 찬 벽에
비계(飛階)를 내려오는 석양의 고단한 그림자가 길게
그려지다, 천천히
미끄러진다. 벽에 떠밀리는 사내가 있다.
벽에, 마감재 같은 사내의 어둠이 오래 발린다.
<'벽화"전문>
그 렇다. 씨멘트 반죽을 바르는 사내처럼 이 인간 역사의 궤적위에 우리의 군상들은 또 덧칠된다. 사람냄새 풍기며, 어깨를 비비며 감내하고 살아가는 바로 여기야 말로 그 실존의 현장이며 사람의 소음이 들끓는 아고라다. 대체 이 만금의 절창앞에 더 무슨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인의 말을 옮겨적는다.
시인의 말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래,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
시,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사람 구경일 것이다.
사람의 반은 그늘인 것 같다.
말려야 하리.
연민의 저 어둡고 습한 바닥,
다시 잘 살펴보면 실은 전부 무엇이냐.
내가 엎질러놓은 경치다.
2008년 4월
문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