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제목[현대시학]-시집.밑줄을 긋는다<시인의 말> 2007년 8월호.2019-07-29 04:56
작성자
2007·08·02 23:10 | HIT : 4,283 | VOTE : 358

시인의 말/시집 [밑줄]

 

밑줄을 긋는다/신지혜

                                                       


 밑줄을 친다. 옛 선사들이나 수행자들은 자신을 비우기 위해서 두타행은 물론, 세속과 거리를 두고자 암자에서 정진한다. 삶이라는 뜨거운 용광로속에 한데 죽탕 밥탕이 되어 끓어 넘치는 곳이 바로 여기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것의 경지가 적멸임을 알게하기 위하여, 그토록 수많은 경전들이 저렇게 쌓여있다. 비움으로서,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자재함에 도달하기 위해 그토록 수행자들은 간곡히 道를 염원한다. 비워야만 모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번 다시 한 모습으로만 세상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말로 바로 모든 것이므로, 나는 나 자신을 비우기 위해 시를 쓴다. 나는 가진 것을 버리기 위해서 수행한다.
 

 나는 늘 무엇이든 순간의 최선을 다하고자 애썼다. 나의 유년은 가난했고 외로웠으며 몹시 궁핍했다. 책은 나의 환상적인 꿈의 보고였다. 나는 모두에게 책벌레나 독서광으로 불려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글쓰기는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삶은 무엇인가. 자신의 고삐를 쥐고 가는 것도 자신뿐이며, 고삐를 놓는 것도 자신뿐이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어디로든 날아가 뿌리내리는 것은 그가 어느 땅에 발을 내리든, 그곳이 바로 자기의 땅임을 알기 때문인 것이다. 경계 없이 날아가 자갈밭이든, 옥토 밭이든 꽃을 피우는 것은 어디든, 지구가 온전히 그의 것이며, 어디나 그의 정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왜 아닌가. 여긴 낯선 이국 땅이다. 그러나 나의 정원은 오대호이며, 그랜드 캐년이며, 대서양이다. 홀로 암흑 속에서 투우사가 되어 자신과 대적하거나, 무수한 밤들을 치열한 열정으로 건너본 사람은 외로움의 낯익은 얼굴을 알 것이다. 외로움도 사귀다보면, 더없이 다정한 벗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 고정된 틀이 어디 있는가? 삼라만상이 본래 평평하고 규격과 형체가 정해져 있지 않다. 인간의 자로선 그 측량이 넓고 깊어서 정확히 잴수 없는 크기다. 그러나 도처에 만져지는 것이 삼라만상의 몸이자 살아꿈틀거리는 우주의 몸이다. 흔들리는 작은 풀꽃이 온 곳과 내가 온 곳이 같고 갈곳도 같다. 모두 우주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큰 원료다.

 작은 무 씨앗같은 이 지구 한알 위에서 네집 내집 편을 가르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큰 모순이다. 인종 色이 어디 있으며, 동서양 문학이 어디 따로이 존재하는가 물어볼 일이다. 모두 공중에 매달린 지구 한 알 위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언젠가, 로스 엔젤레스행 비행기를 탔을 때 이야기다. 고도 3만피트 상공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온통 구름 밭뿐이다. 실로 내가 살던 세상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지상의 내가 사는 집이며 식탁이며 침대가 보이질 않는다. 그곳에선 높낮이도 없고 더럽고 깨끗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모두가 한 장 구름 아래 세상이 두루 평평할 뿐.

 흑인우체부가 무겁게 들고 온 시집을 보니, 가슴이 찡하고 순간 목이 메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나의 것이랴? 내가 지금껏 살아오는데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힘 뿐 이였겠는가. 세끼 양식 일궈준 농심이 그러하겠고 물고기 한 마리의 무주상 보시가 그렇고 햇빛을 가득히 받아 큰 푸성귀 마음이 있는 법. 또한 나를 키운 바람의 채찍이 얼마이고 내게 말 걸어준 새소리가 또 얼마며, 나를 지켜 보아주고 토닥여준 인연들이 또 얼마일 것인가.
나는 이날, 세상에서 가장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뒤뜰에서 곧바로 거행했다. 새 돗자리 네 귀를 활짝 펴고, 사방 두루 큰절을 올렸다. 나는 다시 비워졌다. 나는 조용히 밑줄을 긋는다.

"몸 없는 바람처럼
 마음 없는 구름처럼
 훨훨 떨쳐버리고 가라
 가거라"

-自序 에서 -

[현대시학]8월호.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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