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신문 칼럼

제목[재외동포신문]나의 살던 고향은..신지혜.2019-08-26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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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5 22:34 | HIT : 1,009 | VOTE : 59

<나의 살던 고향은....>


선명한 기억들이 파도치는, 내 고향.
(서울 성동구 행당동)


                                                                 신지혜 시인(미국)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속에 내가 디딘 이 지구별, 그것도 서울 한복판의 왕십리, 행당동이 내 고향이다. 누구나 자신의 본적지를 선택하지 않아도 수 억겁을 돌아와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의 본향이 되어 모태인 듯 포근하게 늘 감싸주는 이름, 고향! 마음은 행려자 일지라도 회귀본성을 가지도록 하는 단 하나뿐인 이름의 내 고향.

 

 나의 고향, 성동구 행당동[杏堂洞]은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세칭 왕십리라 부르는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진펄리 혹은 진팔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십리란, 태조 이성계가 송도의 고려 도읍지를 옮기기 위해,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보라고 명하자, 무학대사는 도읍지를 찾아 왕십리에 이르러 지형을 살피던 중, 도선 대사의 변신인 한 노인이 나타나서 십리를 더가서 도읍지를 정하라는 가르침을 전했다 한다. 그리하여 현재 왕십리에서 10리를 더가서 지금의 경복궁자리에 궁궐터를 잡았다고 하여, 왕십리라 불렀다고 한다. 동으로는 사근동, 북으로 마장동과 도선동, 남쪽으로 큰 매봉산 정상에서 동쪽 산줄기를 타고 전관천까지 응봉동과 접하는 지역을 말한다.

 

 

 왕십리 문화재로는, 전곶교(箭串橋:살곶이다리-조선시대 사적 제160호로 지정)가 있는데 서울에서 광주(廣州) 방향을 통해 삼남지방으로 나가는 주요 도로에 놓인 다리로서 가장 긴 돌다리로 놓여졌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중량천과 청계천이 합류하여 내려가는 강으로 전관천이라고 한다. 그리고 행당동에는 조선 초기, 옛날 북쪽의 5공주가 내려와 행당동에 머물렀었다는 곳에 아기씨당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전통 대동제로 행당동 아기씨당굿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33호로 지정되어 유교식 제례와 무속식 굿이 합쳐진 큰 굿이 열리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고 전해진다.

 


 나는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내 눈동자에 각인된, 안채 깊은 기와집, 대청마루를 끼고 있는 창호지 문살의 방들, 가을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창호지에 국화잎을 따서 붙이곤 하였고, 밤이 되면 풀 비로 구겨졌던 창호지가 시간이 깊어질수록 팽팽하게 펴지면서 바람에 파르르 떨리던 소리를 나는 귀기울여 듣곤 하였다. 또한 마당에 큰 우물이 하나 있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꼭 그만큼만 담겨있는 신기한 우물 속의 물 주름을 나는 심심할 때면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땅속 깊숙이 마술처럼 뿜어내는 가느다란 푸른 물길을 뇌리 속에 가만 그려보기도 하였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대청마루에 누워, 흰 구름이 자유자재로 빚어내는 온갖 사물의 형상을 바라보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였다.  

 또한 앞마당에는 대추나무와 앵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앵두나뭇가지에 다닥다닥 열리던 붉은 앵두 알들의 선명한 눈빛은 지금도 나의 기억에 선명하고 가을에 형제들과 대추를 따던 기억도 한없이 그립기만 하다. 그때 우리 옆집 담장으로 감나무 가지가 넘어와 실하게 늘어뜨린 감나무 그늘은 또 얼마나 깊었던가. 그리고 대보름날, 그 가지마다 걸리던 휘황한 둥근 달의 인자한 웃음은 또 얼마나 넉넉하고 환했던가.

 문중의 장손, 큰며느리인 어머니는 명절 때나 기일마다 놋그릇을 마당에 펼쳐놓고 우리 일곱 형제들에게, 자신의 얼굴이 황금 거울처럼 비칠 때까지, 기왓장가루로 정성껏 마음으로 닦도록 했다. 명절이면, 아껴두었던 한복을 입은 일가친척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마당의 아이들은 멍석을 둥글게 말아 그 위에서 널을 뛰거나 멍석을 펼쳐놓고 윷을 던지며 환호를 지르고 승패를 함께 교감했던 일, 그리고 늘 귀신이 나온다는 골목의 집 앞을 지날 때 우리들 머리끝이 온통 곤두서기도 했던 일,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의 그림자가 유달리 깊은 기인 골목을 나서면, 작은 실개천이 흘렀는데 청계천의 한 갈래라고도 하였다. 그곳엔, 조약돌마저 훤히 비치도록 맑은 물살이 흐르고 있었으며, 우리는 송사리나 올챙이, 붕어, 미꾸라지 등을 잡기도 했었다.

 내가 가끔씩 할머니 손을 잡고 질퍼리 라는 다리 밑을 지나 어느 집 소문난 굿구경을 가던 일, 성동소방서와 경찰서 사거리, 중앙시장, 한양대 주변, 살곶이 다리의 돌다리를 자주 건너다니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마장동 우시장의 기인 뚝 길에서 우시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의 그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소의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말 못하는 짐승도 사람처럼 울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내 고향집을 생각하면, 한편 언제나 전설과 신화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들로 가득차오른다. 6.25 전쟁 때 우리가족이 한강을 건너 피난을 가는 도중, 밝고 푸른 도깨비불이 우리 가족 앞에 나타나 앞길을 횃불처럼 환히 비추어주며 안내해주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집에 도깨비가 살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머니가 어느 날 대문을 넘어가는 도깨비를 직접 목격했다는 이야기 등은 나를 언제나 신비와 상상의 세계로 휘몰아 넣었다. 그 외에도 대궐 큰 상궁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14살 어린 나이의 어머니는, 갑자기 시집을 오게 되어, 푸른 밭두렁 사이로 끝없이 내달리며 많이도 서러워했었다는 어머니 인생사를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가를 적시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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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있지 않은가. 언제나 고향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목부터 메이게 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애틋한 회귀본성이며, 한 生의 불변의 역사가 발원한 곳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지금도 어린 시절의 내 고향을 떠올리기만 하면, 한편의 시처럼 그 정경들이 풋풋하게 발현하고 온통 선명한 기억의 물무늬로 파도친다.

 그때 헤아렸던 별들은 아직도 이 지구 반대편의 하늘, 영롱하게 빛을 내뿜고 있다. 그 시절 빛나던 황금빛 달도 날마다 푸근한 웃음을 변함 없이 내려놓고 휘영청, 가지에 걸려 고향의 그리운 실루엣을 듬뿍 내려놓고 있다. 고향을 늘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한 일인가. 나에겐, 언제나 달려갈지라도 시간의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서 푸근하고 넉넉하게 맞아줄 것만 같은 고향이 거기 늘 자리하기에, 못내 짙은 향수로 마음이 가득 부풀어오른다.

 

<재외동포신문>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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