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제목[경남도민신문]< 시와 함께하는 세상>-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신지혜. 시. 나를 꺾어 받치지 못했노라고- 이창하 시인2021-02-17 1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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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신문] <시와 함께하는 세상>-나를 꺾어 받치지 못했노라고-이창하/시인
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신지혜
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나를 꺾어 받치지 못했노라고
내 생일이라고, 꽃다발 선물하겠다고 그가 말했다 “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 나는 정색하며 손사래 쳤다 나로 인해 꽃 꺾지 말라고, 햇빛 한 모금 삼키려고 안간힘 발돋움하며 치열하게 산 것이 꽃의 생활이니 역시 힘들었을 거라고, 내가 꽃 보러 여기 왔듯이 나를 보러 한 철 찾아온 꽃들에게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고, 꽃과 내가 다 같이 이 지구에 와 어둠 속, 삶의 눈물겨운 불 한 등 켜고 살았다고, 나도 꽃의 탄신일에 나를 꺾어 바치지 못했노라고, 누가 누구를 위해 꺾이고 잘린다는 것 꽃이 한 번도 돼 본적 없는 이는 모른다고, 꽃의 어미나 내 어미나 같아서 우린 결국 한배에서 나왔다고
(신지혜, ‘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
참 재미있는 작품이다. 인도에 가면 ‘자이나교’라는 종교가 있다. 이 종교의 성직자는 ‘동물은 물론 식물들로부터도 이유 없이 약탈해서는 안 된다.’라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영하 40도가 되는 저 히말라야 설산에서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명상에 잠기기도 한단다. 그들의 주식은 ‘풀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따라 떨어진 과일만 먹고, 물고기들이 놀라거나 상하게 할 수 없어 일반 강물에서는 목욕하지 않고 폭포수 아래에서 떨어지는 물로만 목욕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우리 불교의 살생유택(殺生有擇)의 논리조차 허용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존중한다고 하니 이들보다 더한 생명 존중 사상을 가진 종교가 어디에 있으랴.
신지혜 시인의 <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를 감상하노라면 왠지 자이나교도들의 생활이 떠오른다. 나는 가끔 수업 중 학생들에게 사람과 개미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누구여야 할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사람이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학생들에게 다시 학생들에게 그것을 개미에게는 물어본 적이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고려 시대의 문인 이규보의 슬견설(蝨犬說) 역시 같은 명제를 가지고 인간이 일반 생명에 대해서 경중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역설한 바 있다.
꽃 또한 그러하다는 시인의 주장에 심하게 공감한다. 나의 개인적인 기쁨을 위해 꽃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사건이다. 생일날 꽃을 선물하겠다는 상대방에게 시인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논리로 거절한다. “네가 꽃이 되어 보았는가. 내가 꽃을 위해 한 번이라도 나를 꺾어 받치지 못했는데, 나를 위해서 꽃이 꺾여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경거망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꽃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다를 수 없다는 논리다. 그것은 조물주가 이 세상을 만들 적에 오직 사람을 위해서만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모든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도 “모든 죽어가는 것들(생명을 가진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시인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만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즐기는 이 시(詩)라고 하는 것은 그 옛날 샤먼(shaman)의 주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볼 때,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오래전 샤먼의 후예인 시인들의 숙명일 것이다. 신지혜 시인 역시 그런 면에서 볼 때, 천생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일 꽃다발을 사양합니다>를 통하여 모처럼 시인의 본연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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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남도민신문(http://www.gn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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