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21 2016년 여름호 계간평
미래의 하늘을 위해 기도하다
나병춘, 「소금별자리」(창작21, 2016년 봄)
김승희, 「하늘은 공평하게」(창작과비평, 2016년 봄)
양수덕, 「미래의 눈(雪)」(창작21, 2016년 봄)
나희덕, 「미래의 구름」(문학과사회, 2016년 봄)
신지혜, 「나의 기도」(리토피아, 2016년 봄)
이종섶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집이다. 시집 제목과 더불어 「서시」를 통해 제시한 “하늘”과 “별”의 이미지는 한국인들에게, 특히 한국 시인들에게는 일종의 신앙처럼 자리 잡았다.
“하늘”은 “우러러”야 하는 절대적 대상이어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기간은 “죽는 날까지”였으며 그 진실성은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부끄럼”이 없는 자세였다. “별” 역시 “노래”해야 하는 대상이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만 했다. “하늘”과 관계해서는 “부끄럼”이 없는 성찰적 감정을, “별”과 관계해서는 “사랑”이라는 행동적 감정을 각각 보이는데, 이때의 “부끄럼”과 “사랑”은 “하늘”과 “별”을 “우러러” 보고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할 정서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자에게 “부끄럼”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하늘”이 아니거나 “하늘”을 제대로 “우러러” 보지 않았거나 하는 둘 중 하나의 문제일 것이다. 만일 그럴 경우 그 “부끄럼”을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갈지 끔찍하기만 하다. 그 “부끄럼”은 말 그대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해악적 감정으로만 존재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별을 노래하는” 자에게 “사랑”만 있고 “부끄럼”이 없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돌아보는 자로서의 “부끄럼” 없이 “사랑”이 성숙해 갈 수가 없다. 절대자나 절대적 가치가 없이는 “부끄럼”이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부끄럼”은 파괴의 “부끄럼”이 아닌 생명의 “부끄럼”이므로, 그 절대적인 존재의 속성이 가지는 정서를 가지면서 그것이 점점 성숙해가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사랑”은 절대자에 의한 긍적적 “부끄럼”을 동반할 때 참된 가치의 빛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부끄럼”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가 없으면 상처와 고통으로 굳어가기 쉽고, 진실하지 못하거나 자기 자랑으로 변질되기가 쉽다. 그래서 “부끄럼”과 “사랑”을 “죽는 날까지” 확고하고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간 시평을 쓰는 자리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그것은 의도적으로 윤동주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들이 윤동주를,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윤동주가 말한 “하늘”의 의미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1. 영혼의 양식, 공평한 하늘
육신을 위한 양식으로
지상에는
햇볕에 그을린 소금이 있다면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
하늘엔
어둠의 빛으로 담금질된 소금별이 있지
목마르고 고픈 불면의 밤
먼 은하 자꾸만 배회하노라면
손짓하며 빙그레 웃는 별자리들
내 전생은
아마도 오리온 별자리 아니면 카시오페아
저곳인지도 몰라라
마냥 보라꼬 있다 보면
속 끓이던 번뇌들 나비처럼 쿠푸쿠푸 슬그머니 달아나버리니
내 마음의 고향은 아마도 저 환한 소금별자리
-나병춘, 「소금별자리」(창작21, 2016년 봄)
나병춘의 「소금별자리」는 “하늘”을 “양식”과 “고향”으로 설정한다.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하늘엔/어둠의 빛으로 담금질된 소금별이 있”다고 말하는 그것과, “내 마음의 고향은 아마도 저 환한 소금별자리”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육신을 위한 양식”도 되면서 “영혼을 위한 양식”도 되는 “소금”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금” 그 자체가 양식의 기본으로써 중요하지만 “소금”은 상징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역할로써도 중요하다. 음식을 상하지 않고 썩지 않게 하는, 즉 음식의 부패를 막는 질료로써의 역할이 “소금”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소금”이 “영혼을 위한 양식”까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영혼”의 “양식”도 부패할 수가 있어서 그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영혼”의 “소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육신”이 필요한 음식에 “소금”으로 간을 하듯 “영혼”이 필요한 “양식”에도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상하지 않게 한다는 뜻인데, 이때 “소금”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별”이다. 그 “별”을 “어둠의 빛으로 담금질된 소금별이”라고 부른다. 그 “소금별”은 “별자리”까지 이루고 살아서 “목마르고 고픈 불면의 밤/먼 은하 자꾸만 배회하노라면/손짓하며 빙그레 웃”어주기까지 한다. 바라보는 자들에게 “속 끓이던 번뇌들 나비처럼 쿠푸쿠푸 슬그머니 달아나버리”게 하기도 해서 “내 마음의 고향은 아마도 저 환한 소금별자리”라고 고백하게 된다.
윤동주가 “별”을 “노래”하고 또 그 “별을 노해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고 했을 때의 “별”과 “사랑”은 나병춘을 통해서 “별”과 “양식”으로 나타난다. 윤동주의 “사랑”을 얻는 방법으로써의 “양식”과 윤동주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써의 “양식”인 셈이다. “사랑”은 “별”이라는 절대성을 가진 것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있는 이상, 그리고 “죽어가는 것”이 내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상 그 “사랑”의 가치나 성분이나 정서가 달라지거나 변질될 위험이 언제나 상존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별”을 “양식”으로 삼는 행위이며 그래서 그 “별”을 특별히 “소금별”이라고 부르며 바라보는 것이다. “별”이 주는 “사랑”의 맛이 꾸준히 유지되고 제 맛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더욱이 “죽어가는 것” 사이에서 “사랑”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은 공평하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노인에게도
아장아장 걷다가 모래밭에 엎어지는 아가에게도
정장 양복을 차려입고 생명보험을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에게도
아기를 잃어버리고
젖몸살이 난 퉁퉁 불은 젖을 짜고 있는
탐스러운 젊은 엄마의 곡선의 유방 위에도
박사과정 학생의 무거운 가방 속으로도
노점상 아주머니의 산처럼 쌓인 과일 위에도
정신이 혼미한 할머니의 혈관 주사액 주머니 속으로도
하늘은 공평하게 하늘을 골고루 나누어주신다
누구의 하늘인가?
누구의 파란 하늘인가?
난 하늘이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좋다
하늘은 누구의 것이 아니어서 더 좋다
내 것이 될 수 없어서 더더욱 좋다
시간은 떨어지는 칼과 같아서
나 하늘나라 갈 때도
저 산 위에 꼭 저대로 저 하늘 걸어놓고
하얀 신경의 흉터 하나도 남기지 않고, 걷어가리,
두고 가리,
놓고 가리, 저 파란 하늘 그대로
-김승희, 「하늘은 공평하게」(창작과비평, 2016년 봄)
김승희는 「하늘은 공평하게」를 통해서 “하늘은 공평하”다고 말한다. “슬리퍼를 끌고 나온 노인에게도/아장아장 걷다가 모래밭에 엎어지는 아가에게도/정장 양복을 차려입고 생명보험을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에게도/아기를 잃어버리고/젖몸살이 난 퉁퉁 불은 젖을 짜고 있는/탐스러운 젊은 엄마의 곡선의 유방 위에도/박사과정 학생의 무거운 가방 속으로도/노점상 아주머니의 산처럼 쌓인 과일 위에도/정신이 혼미한 할머니의 혈관 주사액 주머니 속으로도/하늘은 공평하게 하늘을 골고루 나누어주신다”고 말한다.
“누구의 하늘”이어서 그럴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늘”이다. “하늘”의 주인은 바로 “하늘”이기 때문이다. 아니, “하늘”이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승희는 “하늘이 공평하게 누구에게나/자기 자신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늘은 누구의 것이 아니”고 “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래서 “더더욱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하늘”인 것을 알기에 죽음 이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바라면서 “저 산 위에 꼭 저대로 저 하늘 걸어놓고” 가겠다고 한다. “저 파란 하늘 그대로” 말이다.
김승희가 말하는 “하늘”의 ‘공평성’은 “하늘” 자체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윤동주가 “하늘”과 관련해서 말하는 “부끄럼”은 그 “하늘”을 통해서 바라본 자신의 내면과 관계가 있다. “하늘”은 “부끄럼”이 없고 그 “하늘”을 바라본 자에게 “부끄럼”을 느끼게 한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김승희가 설파한 “하늘”의 ‘공평성’은 그 “하늘”을 바라보는 자에게 윤동주적 “부끄럼”을 깨닫게 하는 원인 요소로 작동한다. “공평”은 “하늘”의 본질인 동시에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병춘이 말하는 “양식” 개념도 “공평”과 깊은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김승희가 말하는 “하늘이 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은 그 “공평”을 “양식”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고, 그 “양식”이 없거나 변질되는 세상에서 윤동주와 같은 방식으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나병춘이 “하늘”을 “마냥” 바라보면서 “양식”을 구하고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부끄럼”을 가지는 것에 대한 원인 요소로서의 “하늘”의 속성을 김승희의 “공평”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하여 “좋다”, “좋다”, “더더욱 좋다”고 동의해야만 한다.
2. 미래의 하늘은 누가 갖고 있을까
하늘은 모두의 경전
눈은 꿈의 삽화가 곁들인 글귀입니다
눈에게 아주 먼 우리는
그만큼 낯선 가닥입니다
눈의 헌신 안에서도
손에 손 안 잡고 안 잡히고
백색은 노림수를 감춘 바탕이거나 두려움이 숨쉬는 벽
즐거운 침묵 대신 피곤한 떠벌림으로
하나의 강이 둘의 가슴에서 빠져나갑니다
목발로 걸으며 의안으로 봅니다
우리 때문에요 바로 우리 때문에요
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서로가 다져놓은 가장 낮은 바닥인
하품 나는 이론 서적은 덮어버리고
하늘의 시민으로 하나가 되는
우리가 손때를 까맣게 묻히며 들여다보아야할
남북통일의 경전
눈에 귀의(歸依), 귀의(歸依)
-양수덕, 「미래의 눈(雪)」(창작21, 2016년 봄)
양수덕은 「미래의 눈(雪)」에서 “하늘”이라는 “경전”에 대해서 주목한다. 그 “경전”의 “글귀”는 “꿈의 삽화”와 함께 등장하는 “눈”이다. 그 “눈”이 “헌신”한다는 말은 “하늘”이라는 “경전”의 뜻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하늘”의 뜻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위해서 특별한 열심을 품고 일한다는 말이다.
그 “하늘” “경전”에 따르는 “눈의 헌신”은 무엇과 관계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손때를 까맣게 묻히며 들여다보아야할/남북통일”에 관한 것이다. 그 점에서 “눈”은 확실한 “남북통일의 경전”이다. “남북통일”이 오지 않았으므로 “눈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러기에 “서로가 다져놓은 가장 낮은 바닥인/하품 나는 이론 서적은 덮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결코 “경전”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각각이 “경전”처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늘의 시민으로 하나가 되는” 그날을 위하여 “눈에 귀의(歸依)”하고 또 “귀의(歸依)해야 할 때다.
“눈에 귀의”한다는 것은 결국 “눈의 헌신”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인데, 그 “눈”이 말하는 바는 김승희가 보여준 “공평한 하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하늘”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 보내는 것들을 “공평”하게 보내주는 것으로 증명된다. 햇빛과 비가 그러하고 “눈” 또한 그러하다. 어느 누구에게나 심지어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조차 “공평”하게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린다. 그 “눈”이 “하나의 강이 둘의 가슴에서 빠져나”가는 이 땅 위에 내려 “하늘”의 뜻을 보여준다. “눈”이 갈라진 땅을 하나로 만들어 그렇게 “하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눈의 헌신”이자 “눈에 귀의”한 자의 깨달음이다.
플루토늄, 요오드, 세슘, 스트론튬……
구름은 이제 이런 원소들로 만들어집니다.
구름 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클라우드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구름의자에 앉아보십시오.
당신은 비행기 대신 구름을 타고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나일론 섬유로 만들어진 구름은
당신을 아주 멀리 데려다줄 것입니다.
다만, 목적지와 방향과 속력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바람에 달려 있으니까요.
우리의 운명을 우리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북서풍이 불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8시 방사능 수치는 1.67마이크로시버트,
어제 저녁보다는 조금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재앙은 전깃줄을 따라 퍼져가고
소문은 가스관, 상하수도관, 지하도마다 창궐합니다.
기형아가 태어나고
네모난 해바라기꽃이 피어나고
머리가 둘 달린 돌고래가 해변으로 떠밀려 오고
그래도 LED 불빛 아래 채소들은 초록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구름기둥,
저 구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
하늘에 새를 심었습니다.
이제 새들은 하늘 밖으로 날아갈 수 없습니다.
희고 부드러운 구름에 갇혔습니다.
-나희덕, 「미래의 구름」(문학과사회, 2016년 봄)
양수덕이 「미래의 눈(雪)」에 관해 말했다면 나희덕은 「미래의 구름」에 관해서 말한다. “구름”은 “하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더욱이 “하늘”의 변화무쌍한 내용이나 흐름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구름”이므로, “구름”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파악하는 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구름”은 비를 내리기도 하고 “눈”을 내리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 “별”을 가리기도 하다가 그 “별”이 잘 보이게도 하는, 그렇게 “하늘”을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 “구름”을 “플루토늄, 요오드, 세슘, 스트론튬” 같은 방사능 물질과 연관시킨다. 그것은 곧 지상에 방사능 물질이 섞인 비와 “눈”이 내린다는 뜻인데, 그럴 경우 세상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구름 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구름”이 지배하는 “클라우드의 세계”가 펼쳐진다. “구름의자에 앉아” “구름을 타고 여행”을 하면 “아주 멀리 데려다”주는 “구름”, “목적지와 방향과 속력을 정할 수는 없”어 “우리의 운명을 우리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이 북서풍이 불고 있”어서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재앙은” “퍼져가고” “소문은” “창궐”한다. “기형아가 태어나고/네모난 해바라기꽃이 피어나고/머리가 둘 달린 돌고래가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세상이 이렇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대한 구름기둥”인데, 그렇다면 “저 구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을까? 인류를 심판하는 대홍수 이후 노아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 물이 감한 것을 알아본 것처럼, 인류를 심판하는 “구름”이 감하는지를 알기 위해 “하늘에 새를” 날려 보냈으나 그 “새들”조차도 “하늘 밖으로 날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날아와 “하늘”의 “구름”이 멀쩡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했는데 그 “새들”이 “희고 부드러운 구름에 갇혔”버렸기 때문이다. 겉모양은 “희고 부드러”우나 속에는 “플루토늄, 요오드, 세슘, 스트론튬” 같은 심판적 물질을 숨기고 있는 “구름”으로 인해서다.
나희덕이 보는 「미래의 구름」이 이러하다면 그것은 “구름”과 관계되고 “하늘”과 관계된 것들과 그 의미들에게 실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양수덕의 “눈”도 나희덕의 “구름”이 “제조”한 것이고 김승희가 보여준 “하늘”도 더 이상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세상에서 나병춘이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 삼는 “소금별”이 있다고 해도, 그 “양식”이 과연 방사능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여전히 “양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3. 별들의 후손이 별들을 위해 기도하다
나는 날마다 새벽기도 한다
저 광할한 우주공간
별들은 나의 관할, 나의 책임
별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게 하소서
서로가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꼭 그만큼만 팽팽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소서
꼭 그만큼만 서로 존중하게 하소서
서로 비추어보고 서로 격려하게 하소서
복종을 강요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오만하지 않게 하시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업신여기거나 따돌리지 않게 하시고
깊이 생각하는 별들 되게 하소서
진실로 함께
영적 깨달음으로 큰 별들 되게 하소서
별들의 후손인
나는 오들도
신성한 의식처럼 간절히 기도한다
-신지혜, 「나의 기도」(리토피아, 2016년 봄)
지금까지 논의한 흐름에서 보면 신지혜가 보여준 「나의 기도」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앞에서 등장한 시들과 그 시들을 통해서 살펴본 내용들을 아우르는 내용으로써의 “새벽기도”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신이 창조한 신의 영역임이 분명하나 신은 “하늘”을 인간에게도 맡겨두신 것을 알기에 “저 광할한 우주공간”에 있는 “별들은 나의 관할, 나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별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기를, “서로가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팽팽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 존중하”기를 기도한다. “서로 비추어보고 서로 격려하”기를, “복종을 강요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기를, “오만하지 않”고 “칭찬에 인색하지 않”기를, “업신여기거나 따돌리지 않”고 “깊이 생각하는 별들 되”기를, “진실로 함께/영적 깨달음으로 큰 별들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별들의 후손”이기에 “나는 오늘도/신성한 의식처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지혜의 「나의 기도」는 나병춘의 “양식”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김승희의 “하늘”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양수덕의 “눈”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나희덕의 “구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 “기도”는 사실 인간을 위한 “기도”다. “별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별들”이 서로를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별들”이 스스로 “영적 깨달음”을 얻어 “큰 별들”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기보다 그 “기도”의 내용들이 사람을 위한 것임을 간파할 때 그 “별들”을 위한 “기도”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기도”에 “진실로 함께” 동참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것. 그 중심에 사람이 있다. 사람이 “하늘”과 하나 되지 못하면 “하늘”은 “재앙”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 “하늘”을 향해 “하늘”을 걱정하고 탓하는 것이 사람의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소금별”을 “양식”으로 삼아왔고 “공평한 하늘”을 좋아했고 “눈의 헌신”에 감명되어 “눈에 귀의”하는 자세를 배워왔고 “미래의 구름”에 대해 신적인 걱정을 해 온 사람이라면, 그 “하늘”과 그 “별들”을 위해 “날마다 새벽기도” 하는 것을 마땅한 도리로 삼아야 한다.
“미래”의 “하늘”을 위해 기도하는 “별들의 후손”들은 신지혜의 「나의 기도」처럼 기도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기도의 모범으로는 윤동주의 「서시」가 있다. “미래”의 “하늘”을 위해 기도하는 족속들에게 주어진 “모두의 경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