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침, 그리고 단상들
문정희/신지혜/최문자
김유중(항공대 교양학부 교수)
1. 일상속에서 마주치는 낯설음에 대하여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시란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기법으로부터 파생된 언어의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목적에서 산출된 예술품이다 말하자만 일상속에서 익숙한 어법이나 표현법들을 의도적으로 낯설게 배열함으로써 원래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 시이다. 이 이론을 그대로 따른다면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렇게 낯설게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런 이상 그것은 기본적으로 일상어를 통해 익숙하게 표출되어 온 우리 주변의 현실이나 정서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을 전제로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 때, 우리가 시에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바가 '낯설게 표현하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나 그러한 표현법으로부터 빚어진 색다른 느낌, 즉 그것으로부터 빚어진 정서적인 효과에 있다고 한다면, 굳이 이러한 의도적인 왜곡의 과정이 시적 표현법이 지녀야 할 유일한 절대 조건이기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리라. 낯설다고 느끼는 것, 그것은 단순히 언어 배열이나 표현법 상의 문제로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욱 많은 경우에 우리는 문득 스쳐지나가는 현실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현실이, 그리고 지금 마주친 이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문제는 그러한 느낌을 포착하여 이를 시적인 구성과 형태에 담아 적절히 옮겨 적는 일이다. 경험하고 포착하기는 쉬워도, 막상 그것을 시적인 형태로 구성하여 제시해 놓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우리가 의도적인 왜곡의 과정이라고 불렀던 언어적 표현기법 면에서의 고민과는 또 다른 고민이 스며들게 된다. 이 때의 낯설음이란 일차적으로 하나의 상황이지 표현의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무심코 스쳐 지나쳤을 수도 있는 그러한 낯설음을,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내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워보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일 그가 시인이라면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리라는 사실이다.
2. 파뿌리에 묻힌 인생
결혼이란 축복이다. 특히 당사자인 신랑 신부에게 그것은 둘이서 힘을 합쳐 가정을 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질 밝은 장미빛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필요 충분조건이다. 그들을 향해, 주위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그래. 그것은 정녕 영원히 변치 말고 오손도손 서로 아끼며 아들 딸 낳고 사랑하며 지내라는 축복의 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의 억압이기도 하다. 결혼을 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져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압력이자 그것의 우회적 표현일 수 있다. 결혼을 통해 맺어진 두 남녀는 그 순간부터 바로 누군가의 남편과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들에게 부여된 역할과 지위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남편은 아내와 가족을 위해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며, 아내는 자식을 낳고 집안일을 하며 남편과 가족의 뒷바라지를 위해 애써야 한다. 이러한 구도가 가정 내에서 굳어지고 공식화되어 버린 순간, 결혼이란 이미 두사람에게 축복만이 아닌, 억압이자 족쇄이다. 문정희의 텍스트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이미 중년을 넘어선 한 시인이 어느날 문득 부엌일을 하다가 부딪친 이러한 일상의 결혼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크고 뭉툭한 부엌칼로 파뿌리를 잘라낸다 마지막까지 흙을 움켜쥐고 있는 파뿌리를 잘라내며 속으로 소리지른다 결혼은 왜 새를 닮으면 안되는가 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가 뿌리없이 가볍게 날아다니는 깃털이란 그토록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것인가 언제나 정주만을 예찬해야 하는가 가축처럼 번식과 무리를 필요로 하고 영원히 동반이어야 하는가 검은 머리는 언제 파뿌리가 되는가 나 오늘 파뿌리를 잘라낸다 부엌칼 중 제일 크고 뭉툭한 칼로 남은 끓는 찌개에 쓸어 넣은다
문정희,[파뿌리](현대시 4월호) 전문-
누구나 가끔은 현재의 결혼 생활이 덧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혼으로 인한 일상의 끝없는 반복은 생활의 피로와 권태를 불러들이게 마련이니까. 위 시의 중년기 여성이 경험하게 되는 그러한 권태감의 정체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제일 크고 뭉특한 칼로 파뿌리를 잘라 끓는 찌개에 쓸어넣는 행위를 통해, 내면에 억압된 심리상태을 어느 정도 만회해보려 시도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터져나오지 못하고 안으로 삼켜 버리는 내적인 절규에 불과하다. 누구도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선뜻 넘어서지는 못한다. 결혼은 이미 우리의 의식 내에 자리잡은 억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덧없음과 억압에 대한 불만이 반드시 상대방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가 그들에게 부여한 사회적 역할과 위상에 대한 불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만으로 인한 내적 절규가 쉽사리 밖으로 터져나오지 못하고 삼켜지고 마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텍스트를 통해 제시해 놓고 있다.
3.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러나 지워질 수 없는
'아우라의 상실'을 주장하던 이론가가 있었다. 기술 복제로 예술품들의 대량 복제 제작이 흥행하는 이 몰염치하 상업화 시대에 임하여, 더 이상 인간은 예술 작품으로부터 그 어떤 신비스러움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논리다. 한때 나는 그의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딘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기도 하다. 과연 그럴까. 혹은 시대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과 문화 예술 자체의 억측성을 무시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왜 굳이 옛날 영화를 보러갈까. 첨단 제작 기법으로 무장한 할리우드의 최신 액션물들을 제쳐놓고, 왜 굳이 마니아들은 비가 죽죽 내리는 무성형화를 고집할까. 이것이야말로 예술 자체가 지닌 아우라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에도 분명 아우라는 있다. 그것도 더욱 강한 흡입력을 지닌 채로. 신지혜의 텍스트를 접하는 순간, 나는 그가 한 순간 이러한 아우라의 경험을 접하였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취미나 기호와도 관계가 있는 것이긴 하나, 더 넓은 시각에서 본다면 이 시대에 살아 숨쉬는 아우라의 발현 순간과의 마주침이라 할 만하다.
이제 그 여가수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득한 그곳에서 몸은 버리고 목소리만 젖어왔습니다 얇게 압축된 가벼운 디스크 한 장속에 눌린 그녀의 목소리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마력이 아직 살아있어,
...중략...
노래의 시간은 허방처럼 깊고 흑단의 긴 생머리 찰랑찰랑이던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윤기로 넘실넘실거렸습니다
나는 좀더 가까이 듣기위해 내 안으로 귀를 말아넣습니다 가는 혈관을 따라 번져가는 힘센 사랑이 내 휴식의 텅빈 활선을 따라 번져갑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번 입력된 그녀의 곡조는 지워지지 않은 채 내 구석구석을 돌아 문득문득 찢겨진 내 생각 밖으로 흘러나와 나를 물들이고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녀의 회전을 좀처럼 멈출 수 없습니다
-신지혜[죽은 여가수의 노래](현대시학 4월호)부분
여기서 시인이 마주친 것은 단지 흘러간 대중가요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요의 곡조며 정서는 이제는 두번 다시 무대에서 볼수없는 어느 여가수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자극한다. 흘러간 가요는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익숙하면서도 왠지 촌스럽게 생각되는, 그리하여 한편으론 낯설게 느껴지는, 이러한 익숙함과 낯설음의 동시적인 대비효과야 말로 기술복제 시대만의 아우라적인 효과가 아닐까. 누구나 친숙해 있으면서도, 또한 누구나 거리감을 경험하게 되는, 그러한 거리감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이 시대의 아우라의 본질이 아닐까. 실상 이러한 자극은 그 어느 수준 높은 예술품을 대할 때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인을 그 마력으로부터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문화 예술 작품이 지닌 아우라는 그것의 복제 여부에 관계없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게 마련이다.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복제 기술에 담긴 그 아우라의 순간을 포착하였던 것이다. 그 곳에는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을 잡아끄는 마력이 살아 숨쉬고 있다. 시인의 표현대로'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마력'이.
4 마음이 가 닿은 곳
끝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존재다. 시작이 신선함과 활기넘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끝이란 쓸쓸함과 애잔함과 왠지모를 아쉬움 같은 것을 남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시작의 활기참을 그리워하기보다는 끝의 아쉬움에 오히려 마음이 쏠린다. 그것은 씁쓸함으로 다가오곤 하지만, 때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되돌아 볼 막연하 아쉬움과 그리움의 흔적으로 우리 곁에 남기도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한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위 진술의 내용이 좀더 절심하게 다가오리라. 대부분의 경우, 사랑의 시작과 끝은 삶의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가온다. 우리가 미처 준비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들이닥치며, 더불어 우리가 충분히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그러한 소용돌이의 순간이 그치고 나면, 삶이란 결국 그 끝의 흔적으로나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부터 이 끄트머리에 와 서 있었을까? 힐끗 돌아만 봐도 여기저기서 날 버리고 끝낸 삶은 끝의 흔적일 뿐 벌판을 누비다 우뚝 멈춘 민감한 들짐승의 꼬리 끝 깥은 그 쓸쓸함 참을 수 없어 어느 날, 땅끝마을로 갔다
...(중략)
처음에 앉았던 자리에 사라질 일만 남은 배배 마를 끝이 처음의 저 북쪽의 창가에 뼈도 살도 다 내놓고 같이 앉아 있었던 일, 까맣게 몰랐겠지. 반짝였다면, 정말 사랑했던 마지막 여자처럼 끝이 반짝였다면, 아직도 묵묵부답인 끝을 더듬어본다
-최문자,[끝을 더듬다](문학사상)4월호 부분.
최문자가 찾은 곳은 반도의 끝인 땅끝마을이다. 표면적으로는 끝의 아쉬움을 비틀어 버리기 위해서라지만, 실상 그곳을 찾은 진짜 이유는 무언가의 끝이 남긴 아쉬움, 그 흔적이나마 더듬어 보기 위해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읽어야 할 것은 땅끝이라는 물리적, 지상적 한계보다는 끝이라는 인식이 남겨준 심리적 여운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아쉬움의 감정이다. 그 아쉬움은 아직도 주체의 내면에서 반짝이며 그를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의 실체가 아닌 흔적, 지나쳐 버린 과거의 희미한 흔적일 뿐이다. 우리가 더듬어 보기엔 너무나도 희미해져 버린, 아무리 들춰보아도 묵묵 부답인 흔적일 뿐이다. 끝은 환기하는 것은 고통일수 있지만, 그것이 고통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님 또하 분명한 일이다. 끝의 흔적을 더듬는 일은 또 다른 측면에서 내밀한 즐거움의 작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끝이 남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 참을 길 없는 그리움과 그것을 되짚어 보는 자의 은밀한 즐거움으로 환치시켜 놓는다. 고통을 쓰다듬는 일은 괴로운 것이지만, 시에 있어서의 고통이란 그 자체가 도리어 즐거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인생의 가장 아름답던 순간에 다가왔다 사라진 일인 다음에랴.
2002년 <현대시>5월호. 현대시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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