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자재하면서 쓸쓸한 존재
조해옥(문학평론가)
1.<이쪽>과 <그쪽>의 소멸
신지혜 시인은 대립하는 것들의 간극이 소멸하기를 꿈꾸며, 이로써 숙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조건을 뛰어넘고자 한다. 그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내재하는 본질적인 것을 탐색한다.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 영혼일지라도 시인의 시적 자아는 그것과의 동일시를 꾀한다. 그가 다른 것들에서 동질성을 발견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감을 가지려는 데 있다.
가만 귀를 대본다 격렬한 고요의 수런거림,
쿵쿵쿵, 박동이 뛰고 있었다
저 우주심에도 내 박동이 파동치고 있다니,
리듬을 타고 내 피톨들 경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우담바라 후드득, 피어나다]부분
어찌 땅 속만 날아가랴. 나는 어느 츰엔가 네 속을 날았다.
네 몸의 뼛속 중심을 통과했다.
눈 없고 입 없고 발 없는 몸으로 날았다.
춤추는 무한 광자와 원자의 아버지와 어머니 속을 날았다.
-[나는 날았다]부분
내가 빨아들인 이 공기도
지금은 아득히 사라진 古代, 그 어느 死者의
내부를 탱탱이 살찌웟던 그 물빛
숨결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풀무를 돌리며
차가운 눈물을 따뜻이 데워냈을 것이다
-[공기 한 줌]
위에 인용한 시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신지혜 시인은 타자와의 융합을 시도한다. 시인의 시적 자아가 하나의 개체로서의 <나>에게 머물러 있다면, 나의 존재는 나를 외부와 차단시키는 굳건한 성벽과 같은 것이다.그러나 시인의 시적 자아는 <나>의 성벽을 날아올라서 다른 개체들과 함께 호흡하고자 한다. 이 같은 시인의 의식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주체의 발견이다. 타자와의 융합은 인식하는 주체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고스트]에서도 시인은 소통이 불가능한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경계까지도 소멸되기를 꿈꾼다.
백년 후, 난 이곳에 없을 것이다
유령이 될 것이다
이 행성에 왔던 흔적도 없이
공기 문 드르륵, 열고 나갈 것이다
그러면, 그쪽은 此岸이고 이쪽은 彼岸이 될 것이다
문득, 이 별 들여다보면,
둥그런 꿈 한 채는 아직도 상영 중일 것이다
똑같은 수천수만의 내가 너무 많아
헬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난 누구인가
스스로 묻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시간의 쾌속적에 먼 훗날의
고스트들과 동승하여
체스를 두듯 시를 둔다
자, 어서어서
리드미컬한 심장박동을 켜고
음악에 맞춰
뼛속까지 혼곤한
영혼 한 곡을 짜야지
아직, 내 찻잔엔 흰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나는 낄길낄, 흐뭇한 웃음 입가에 흘리고 있다
-[즐거운 고스트]전문
위의 시에서 <이쪽>은 시인의 시적 자아가 서 있는 현재 공간을 가리키고, <그쪽>은 시적 자아가 언젠가는 당도할 미래의 공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쪽>은 이승을,<그쪽>은 저승을 의미한다. 저승은 이승과는 소통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신지혜 시인에 의하면 이들 공간은 구분되지 않는다. 화자에게 <백년 후>의 물리적인 시간이 흐르게 된다면, 此岸인 <이쪽>이 彼岸이 되고 피안인 <그쪽>이 차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쪽과 그쪽, 이승과 저승, 차안과 피안은 모두 무의미한 구분이 되고 만다.
여기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신지혜 시인은 삶과 죽음의 공간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이쪽과 그쪽의 현격한 간격은 소멸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수명은 어쩌면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으로 분리도니 두 공간의 경계를 시인은 시간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거시적인 시선으로 지워버린다.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에 실재하는 화자에게 <백년 후>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부여한다면, 그는 <흔적도 없이>사라져 버릴 것이다. 화자는 <백년 후>의 시선으로 현존하는 물상들과 인간을 바라볼 때, 고스트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 시의 화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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