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사랑하는 사람들>9,10월호.-조경희. 밑줄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제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어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 이 시의 풍경을 그려보자.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빨랫줄이 쳐 있다. 빨랫줄을 배경으로 구름이 흐르고 가끔 천둥도 친다. 밋밋하고 심심한 풍경 속에 있는 것이라곤 달랑 빨랫줄이다. 더군다나 빨래가 널려 있지 않은 빈 빨랫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허공에 걸려 있는 거추장 스러운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 빈 빨랫줄에서 시인은 '밑줄(_)'을 읽는다. 눈에보이는 것만 사랑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시 여기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밑줄'을 그으며 '중요한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빈 빨랫줄 위로 무수한 바람이 지나고 구름도 지나고 또 번개도 치지만 정 작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허공중 흔적을 남기지 않는 空의 말씀을 읽어 야 한다는 것.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고 귀담아 듣지 않는 풍경들이 지금 '밑줄'위에서 고요히 발효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에 귀 기울여 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것을 볼 줄 아는 시인의 혜안. 그 무한한 空의 말씀이, 고요히 발효된 풍경들이 빨랫줄 위 에서 파르르 빛나고 있다. 밑줄이 되어 무언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 (조경희) *조경희: 시집속의 시 읽기 (2007. 9-10월호)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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