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소통을 주제로 한 네 번째의 기획으로 한국시의 틈새 읽기를 마련하였다. 푸코의 말을 빌리면 어떤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존재한다. 이런 과정은 문학사를 기술하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니체는 계보학자들은 넓은 영역을 개척해야 하며, 자유정신의 용기와 혹독한 박학 그리고 현미경과 같은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의 온갖 가치판단을 해명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계보학은 기원이 아니라 사건들에 대한 탐색 곧 그것의 특이성singularity을 기록하는 것이다. ‘틈새’를 읽는 것은 보편화된 주류의 틈 속에서 숨 쉬는 섬세한 감성을 찾는 일이다. 작금에 쓰여지고 있는 문학사를 보면 니체의 계보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문학사는 여전히 소수의 문학인만을 종횡으로 줄 세우는 ‘그들만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은 여전히 작은 틈 속에서 치열한 정신으로 뛰어난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그 어떤 계보에서도 제외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묵묵히 만들어나가는 시인들이 있다. 이미 우리 시단은 너무 많은 문예지와 시들의 범람으로 인해 소수의 평론가들이 시를 제대로 읽어내고 평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대학의 제도와 평가가 명민한 평론가들을 현장에서 이탈하도록 만들고 있다. 고집스럽게 평론의 길을 가고 있는 필자들은 많은 청탁 원고에 파묻혀 힘들어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시인들이 서로의 작품을 찾아 읽고 그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미 시인들의 시 보는 눈이 얼마나 밝은 지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 숨어 있는 시 중에서 좋은 시를 찾아 읽기로 하였다.
선정 텍스트는 한국시로 한정하였고, 선정한 시에 대한 소개와 사연, 감상평을 자유롭게 집필하도록 하였다. 이번 기획의 청탁 대상은 최근 본지에 작품이나 글을 발표한 시인들은 가급적 제외하였고, 1980년대 시인부터 2000년대 시인까지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들로 선정했음을 밝힌다.
이사라는 반칠환의 시 <웃음의 힘>을 읽었다. 다변가가 아니면서 은유의 힘을 믿는 시인, 여운을 남길 줄 아는 시인,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시인, 진짜가 무엇인지 아는 시인, 엄살하지 않는 시인, 성숙한 시인, 그의 시는 그런 시인에게서 나온 소금 같은 시라고 말한다.
양애경은 이기와의 시 <순댓집―영자야 23>을 읽었다. 이기와 시인이 경험한 삶의 사연들을 눈여겨 본다. “안해 본 일 없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이력이 그녀의 시의 원천인 동시에 굴레인 때문일까”라고 물어보는 시가 ‘영자야’ 연작시들이다.
이승하는 작고 시인 이경록의 시 <길>을 읽었다. 이경록 시인은 1977년 나이 서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천재성은 시인 이상李箱에 못지 않지만 지금까지 큰 조명을 못 받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길>은 언어를 선별하여 배치하는 시인 본연의 연금술사적인 재능이 탁월한 작품이라고 평한다.
정일근은 윤효의 <못>을 읽었다. 윤효는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25년의 시력에 <물결>(2001, 다층), <얼음새꽃>(2005, 시학)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짧은 시를 주로 쓰는 윤효 시인은 서정춘, 유재영, 이시영 선생을 전범으로 삼는 시인이라 말한다.
강성철은 이관묵의 시 <나무의 시간>을 읽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이관묵의 시를 통해 “세상과 동떨어진 외딴 곳에서 칩거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때로는 삭히며 무섭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마음의 각을 세워가는, 다시 말해 무서운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했다.
정숙자는 김윤배의 시 <조선족의 노래>를 읽었다. 28행으로 구성된 시는 역사성과 비극미를 통해 죽은 자의 절규를 들려준다. 시인은 시를 통해 “쏟아진 한마디 한마디는 개인의 심중에 맺힌 천둥일 뿐 아니라 전 조선족의 가슴에 흐르는 피눈물”이라고 말한다.
홍일표는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임찬일 시인을 주목한다. 임찬일 시인은 2001년 작고했는데, 투병 중에도 문학의 끈을 놓지 않고 좋은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쏟아낸 시인이라고 전한다. 문단의 냉대와 외면 속에 많이 외로웠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인이다.
김유석은 오늘의 <둥근 나라의 앨리스>를 소개한다. 자신의 시적 취향을 “나와 유전자가 닮은 시편들에서부터 최근의 낯선 상상들에 이르기까지 고루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보다 각별히 주목하는 것이라면 그 사이쯤에 위치해 있는 글들”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시인의 작품을 선정했다.
최준은 문근식의 <비밀의 방>을 읽었다. 문근식은 충북 음성군청 환경보호과에 재직하고 있는 공무원 시인이다. 지방 시인인 그는 소위 말하는 문단 정치를 모르면서 정직한 시쓰기에 몰두하는 시인이다. 부부얘기를 진솔하게 시로 형상화한 <비밀의 방>을 소개하고 있다.
박현수는 재미시인 신지혜의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를 읽었다. 시인은 “현관문을 열면 그 문에 밀려 아득한 골목이 아코디언처럼 접혀진다는 이 기막힌 상상력은 우리 시에 낯설면서도 가치 있는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김경수는 박강우의 <동물 해방운동>을 읽었다. 박강우의 시는 “발상이 신선하고 선언문의 형식을 빌은 표현 방법도 재미가 있다. 가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톡톡 튀는 상상력을 포함하여 현대 사회에 대한 새로운 형식의 비판 정신”을 가진 시라고 말한다.
권현형은 김정희의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를 읽었다. 김정희는 2000년 <문학과의식>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김정희 시인의 시를 “그녀는 문학의 흉곽 안에 속한 사람. 그녀는 흉곽 안쪽에서 좁은 흉곽을 더 좁게 만드는, 더 높게 만드는 화사한 밖의 눈부심을 기록한다”고 전한다.
김참은 서대경의 시 <집결>을 읽었다. 김참은 서대경의 시는 독특하며 최근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또한 “서대경 시의 뛰어난 점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있다. 그는 시를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시라는 장르의 족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이유를 전하고 있다.
박남희는 정용화의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니타>를 읽었다. 시에서는 방, 자궁, 달의 상상력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생명성과 모성성과 문학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척박한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정용화 시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김종태는 작고 시인 김구용의 시 <반수신半獸身의 독백>을 읽었다. 김구용은 사후에도 크게 평가받지 못한 시인이다. 김구용의 시가 저평가된 사정과 <반수신의 독백>이 김구용 초기 산문시 중 한 편으로 육체와 정신,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의 갈등을 형상화하는 독특한 작품이라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조영순은 김상헌의 <포스트 잇>을 읽었다. 시를 통해 “훗날 낡은 수첩을 정리하며 우연히 만나게 될지라도 새롭게 옷 벗는, 그런 무언가를 남기자고 한다. 그런 약속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평한다.
김미정은 우진용의 <이진법에 대하여>를 읽었다. 우진용은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한 시인이다. 이 시는 그의 등단작이며, 1992년 퓰리처 특별상을 받은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소설인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고 창작한 작품이다. 따뜻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냉철한 이성적 시각이 돋보이는 시라고 평하고 있다.
고영은 김정미의 <지뢰밭>을 읽었다. 고영은 시를 읽은 체험을 전하고 있다. 여성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지뢰밭의 긴장감을 너무도 생생하게 펼쳐놓았으며, 마치 내가 비무장지대의 지뢰밭을 걷고 있는 듯한 아찔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박후기는 김원경의 <소라껍데기>를 읽었다. 현란한 수사에 크게 기대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낯선 방식으로 현실을 드러낼 줄 아는 시인이 김원경이라고 말한다. ‘소라껍데기’는 흔히 놓치기 쉬운 리듬이라든가 압축의 묘미들을 살리면서, 이 한 대목을 위해 시어들이 제목을 가만히 추수追隨하게 만든다고 평한다.
우진용은 정낙추의 <동행>을 읽었다. 정낙추 시인은 태안의 모항에서 농사에 매달려 사는 시인이다. 우진용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풍경에서 모든 존재의 여일함을 담담히 보여준다”고 시를 평한다. 또한 “보여주는 것은 사소하지만 그 울림은 삶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고 말한다.
정겸은 한혜영의 <뱀 잡는 여자>를 읽었다. 한혜영의 시를 가리켜 ”우리나라의 중년 여성이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성이며 일상의 체험을 시로써 승화시킨 체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를 감상하다보면 가정을 위해서는 어느 무엇이라도 싫어하지 않는 희생적 정서를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김휴는 이영수의 <몽유병자들은 결코 달을 보지 않는다>를 읽었다. 시인은 “정말 우연히 이 시를 만났고 그리고 이 시인의 시세계를 헤집고 돌아다닌 며칠 동안 시인의 상상력을 몹시 괴로워했고, 그리고 며칠 뒤에는 그 상상력을 그리워했었다”고 시를 만난 때를 고백하고 있다.
한국시의 틈새 읽기는 시인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다. 틈새 속에서 열정적으로 창작에 임하고 있는 시인들을 보면서 창작자로서의 직무유기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기획을 통해 더 치열한 창작 의욕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_ 현대시, 2008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