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시와의대화>

제목[뉴욕중앙일보] <시와의 대화> 염소와 풀밭/신현정2019-07-18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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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31 13:12 | HIT : 8,715 | VOTE : 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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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의 대화> 염소와 풀밭-신현정  






염소와 풀밭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

신지혜

시인



말뚝에 매여있는 푸른 풀밭의 염소 한 마리를 떠올려본다. 염소와 풀밭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정경 속에서 염소 한 마리가 아니 내 자신이 원을 그리고 있다. 행동 반경 안의 모두를 소유하는 한 마리 염소가 그리는 둥그런 원은 말뚝에 매인 줄의 길이에 따라 세상 위에 둥글게 경계를 그린다.

그러나 그것은 비애인가. 낙관인가. 이 시는 말한다. 염소는 그 얼마나 풍족한가. 말뚝에 발목이 잡힌 염소가 그릴 수 있는 행동반경 안의 것은 모두 염소만의 것이다. 이 시는 염소의 통제된 제한구역 밖의 비애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운명론적 시선으로 역설에 역점을 두지는 않는다.

오히려 염소가 가진 것이 보여주는 것들은 자기 영역 속에서의 자유와 안위인 것. 그 테두리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도 새들도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오직 그의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운명의 말뚝에 박힌 우리의 삶 또한 그렇다. 눈물겨운 원심력에 의해 둥글게 그려진 그 영역은 우리의 온전한 소유며 권한이다. 이렇게 힘센 지구에 말뚝을 박은 우리들의 삶에 더없이 시린 풀밭이여 차라리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며 그 말뚝의 힘이 우리를 아름답게 구속하며 그 보호 안에서 방목된다고 역설한다. 그래도 이 풀밭은 아름다우며 축복된 영역인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인생과 녹록치 않은 삶의 철학이 담긴 서정적 풍경의 이 시는 시인의 사유와 통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의 중량과 심미적 시선이 따뜻하게 녹아있는 거기 푸르른 풀밭 위에서 아직도 염소가 둥근 지름을 그리며 풀을 뜯고 있다.



신현정 시인은 서울 출생. '월간문학'(1974)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립' '염소와 풀밭'이 있으며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입력시간 :200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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