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의 대화> 밥그릇 경전-이 덕규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이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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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시인
밥그릇을 가지고 노는 절집 개 한 마리를 보라. 더욱이 얼마나 잘 비워놓았으면 고요히 반짝이겠는가.
생명 있는 존재치고 밥그릇이 없는 존재가 있던가. 밥그릇이야말로 목숨을 가진 자들의 중대사적 관건이며 또한 영원한 전쟁터의 빌미인 것. 생존을 위하여 먹이 각축전을 벌이고 또 타인의 먹이를 탐하거나 빼앗기도 한다.
허나 어찌 육신을 위한 밥그릇뿐인가. 타의 정신을 노략하는 잘못된 정신의 밥그릇 양심을 팔고 자신의 배를 채우는 욕망의 밥그릇 타인을 짓밟고서 차지하는 명예의 밥그릇…온갖 부끄러운 밥그릇들 또한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기도 하다.
이 시는 허기를 채우는 용도의 밥그릇 뿐만 아니라 개나 사람이나 자기 밥그릇을 제대로 잘 비워내야 한다는 깨달음을 묘파하고 있다. 세발우거라는 화두인 조주선사의 〈밥그릇이나 씻어라>라는 그 속뜻이야말로 비우고 씻어냄으로써 발우에 담긴 무소유와 깨달음의 지혜를 터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금강말뚝에 묶인 개가 한 경지에 이르러 자기 마음대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근잘근 씹어 경전을 외우고 있다. 하물며 사람 밥그릇이야말로 잘 비우고 잘 씻어내야 할 것이라는 번뜩이는 경구가 돌연 독자에게 벽력같은 뇌우를 친다.
이덕규 시인은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현대시학](1998)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가 있으며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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