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시와의 대화]빈 집........기형도
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신지혜
시인
슬픔에도 돗수가 있다면 이시는 아마 보드카나 럼주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잃고 슬픔의 절정에 이른 쓰디쓴 절규와 통렬한 비감이 몸부림처럼 고스란히 그 뼈대가 드러난 시인 듯 싶다.
이 시에선 슬픔이 슬픔을 파고 더 깊숙이 침잠하여 마침내 그 저변에 가 닿는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는 싯구처럼 무엇이 이보다 더 처절한 극한이 되겠는가.
이미 사랑은 떠났다. 공유했던 모든 것들은 막을 내리며 절망의 끝에 이르렀으므로 그 사랑의 슬픔을 빈집에 가두고 돌아서야만 한다. 아니 돌아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 빈집이야말로 처절한 이별의 극치심경을 토로한다.
이 시인의 독특한 감수성과 우울한 시선은 부조리한 세상을 슬프고 아름답게 노래하였지만 아쉽게도 일찍 유명을 달리하여 짧은 생을 접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살아있는 시편들은 더 강렬한 색채와 강인한 생존력으로 많은 이들의 뇌릿속을 점령하고 끈질긴 사랑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기형도 시인은 (1960-1989). '동아일보' 신춘문예(1985)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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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2004. 11. 02 17: 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