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중앙일보>[시와의 대화]감자의 몸 -길상호.
감자의 몸
길 상 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을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하지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는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웅덩이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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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지 혜
시인
그저 흙 속에서 단단하게 여물었을 둥근 감자들 그러나 이 시는 감자 한 알의 생을 인간과 대비하여 섬세하게 통찰한다.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던 감자의 움푹한 그 웅덩이들이 바로 무수한 절망들의 웅덩이라는 것 그리고 뼈아픈 상처의 깊이였다는 것을 시인은 사려깊고 따뜻한 눈길로서 짚어준다.
누구의 인생도 고요하거나 잠잠한 인생이란 없으므로 비단 감자 한 알의 생마저도 우리 인간의 생과 다름없는 고투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찌 가슴이 싸아하지 않을 것인가.
칠흙 속에서 때로 절망에 이르러 혹독한 감내의 시간을 견뎠으리라. 그리하여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공생 공존의 깨달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내성있는 아픈 상처들은 마침내 생의 추진력이 되어 씨눈이 되는 것. 그리하여 눈부시도록 '세상에 탯줄을 대는 것이라 시인은 갈파한다.
우리가 사방을 둘러보면 세상 모든 것이 거저 되는 것이 어디 있던가. 모든 존재들의 형형한 반짝임들은 결국 고통들의 결실인 것이다. 다만 모르는 사람들은 감자가 독을 품은 것이라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도려낼 지 모르지만 그 씨눈들에 의하여 다시 멈추고 싶었던 절망의 순간들이 다시 무릎을 일으켜 세운 것이 아닌가. 이 시는 모든 존재들의 생을 알알이 일깨우며 따뜻하게 마음을 적셔주고 있다.
길상호 시인은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2001)로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가 있으며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다.
뉴욕중앙일보 입력시간 :2004. 12. 13 17: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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