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27 22:04 | HIT : 3,249 | VOTE : 211
[미주 중앙일보]<시와 함께>황 홀-정진규
황홀 -알 13-
정진규
내가 만난 황홀들은 늘 도둑같이 왔다 담장을 넘어왔다 잠들다 깨어나 보면 맨몸으로 곁에 누워 있었다.햇볕 대낮 속에서도 도둑같이 왔다 어두움의 장막을 치고 담장을 넘었다 그것 도 얼굴 가리운 복면으로 왔다 돌들은 돌들의 담장을 넘었으며 풀잎들은 풀잎들의 담장을 넘었다 새들은 새들의 담장을 깃털 속에 감추고 왔다 따뜻한 담장이었다 그렇게 황홀들은 왔다 저마다의 열쇠 꾸러미가 속주머니 속에서 절그럭대고 있었는데 그 용도를 나는 알 수 가 없었다 우리집 대문은 언제나 잠긴 채로였다 다만 한껏 바알갗게 열린 사물의 입들, 이를 테면 滿開의 영산홍 한 그루, 그를 이 봄에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
황홀은 어떻게 오는가. 조용한 그림자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은 채로 온다.흔적도 없이 삶의 틈새마다, 행간마다 그 경계를 넘어선다. 보라! 이미 당신 곁에 누워있다. 시인은 그것을 묘 파한다.햇볕의 백주 대낮에도, 담을 타넘는 도둑처럼, 혹은 어두움의 장막처럼 스스로를 드 러내지 않고 슬며시 다녀간다. 돌들은 돌들 스스로의 담장을 넘고, 풀잎들은 풀잎들의 담장 을 넘고 새들 또한 그렇다. 사물들의 내부 깊숙이 황홀이 자작자작 스며드는 정황이다 물론, 시인의 주머니 속, 절그럭대는 열쇠 꾸러미가 있고 집 대문은 언제나 잠겨있었다. 그러나 황 홀은 알리바이 없이 온다. 이 시가 진한 감동과 더불어 묘미의 일격파를 던져주는것은, '소란함을 앞장세워 오지 않는 황홀'이기 때문이다. 고요한 황홀이지만, 정신이 번쩍 들도록 일상의 정수리를 후려친다. 개 별적인 사물들의 삶속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황홀들을 이미 간파해버린 시인은, 보이지 않는 사물의 각개 이치를 훤히 묘파해버린다. 그리하여 영산홍 한 그루 같은 황홀을 역시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상적 일상에 있어, 모 든 황홀은 이미 다녀 갔거나, 어쩌면, 다가서고 있는 것, 또는 이미 와서 내옆에 저렇게 피어내 고 있는 것임을! 통쾌한 일격의 이 시로 인하여, 우리의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일상은 모두 개화 된 황홀이다!
시인은 경기 안성 출생. 동아일보 신춘문예(1960)로 등단,'마른 수수깡의 평화' '들판의 비인 집 이로다' '뼈에 대하여'꿈을 낳는 사람' '몸 詩' '알 詩' '도둑이 다녀가셨다'등 다수 시집과 한국 시인협회상.월탄문학상.현대시학작품상.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뉴욕. 신지혜시인>
-[미주 중앙일보]2003년 8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