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코리아신문』
[詩 가 있는 세상]
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김신용(1945~)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 버린다
치워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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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에게서 배운다. 운수납자같이 맨몸으로 기어가는 민달팽이 한 마리. 가진 것이 많아도 욕망을 멈추지 못하는 불능의 인간들에게 이 민달팽이가, 신선한 충격으로 죽비를 내려친다. 道를 묵묵히 걸어가는 치열한 자에게, 방해물이나 달콤한 안위가 무슨 장애일 것인가. 또한 순간의 명예와 부의 그늘이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비록 맨몸이지만, 도인같은 민달팽이의 서릿발 한 말씀이 뇌우를 내려놓는다. 치워라, 그늘!
김신용 시인은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환상통> <도장골 시편> 등이 있으며, 천상병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지혜<시인>
<신문발행일.Nov. 30.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