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기
윤동재
*차옥혜, 「마음의 눈으로」(『문학과 창작』 2002년 4월호) *채호기, 「읽을 수 없는 수련의 말」(『문학사상』 2002년 4월호) *신지혜, 「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다」(『현대시학』 2002년 4월호)
1.
잘 알다시피 헬렌 켈러는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로 불려지고 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열아홉 달 만에 열병을 앓아, 소경·귀머거리·벙어리가 되었다. 헬렌 켈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말할 수도 없는 신체조건에 낙망하지 않고 가정교사였던 설리번 선생의 살뜰한 교육을 받은 끝에, 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1900년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1904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이 때 마크 트웨인은 “삼중고를 안고 마음의 힘,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차지하고도 아직 여유가 있다” 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헬렌 켈러가 장애인이었으면서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육체의 눈과 귀는 열리지 않았으나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곧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면 행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육체의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육체의 눈과 귀가 열렸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눈과 귀까지 함께 열리지 않으면 참다운 의미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육체의 눈과 귀만 열린 사람은 사물이나 세상살이를 살피면서, 스스로가 살핀 대로 자세히 묘사할 수는 있어도, 사물이나 세상살이에 내재한 그윽한 이치는 밝혀낼 수 없다. 그래서 육체의 눈과 귀가 열린 사람이나 열리지 않은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바라건대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기를 꿈꾼다. 특히 시인은 육체의 눈과 귀로만 보고 듣는 데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은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보려고 하고, 들으려 한다. 이 달에 발표된 시 가운데는 이 점을 확인해 주는 시가 몇 편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달에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살펴보는 일은 공연한 헛수고가 아니다.
2.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입구까지 벚꽃길은 누구나 한 번쯤 걸어 봤으면 하는 길이다. 수십년 벚꽃나무에 벚꽃이 핀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 십리 벚꽃길은 일명 ‘혼례길’로 알려져 있다.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잡고 이 길을 걸으면 그해 꼭 결혼하게 된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차옥혜 시인은 쌍계사 입구의 벚꽃길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울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진 남산의 벚꽃길을 거닐면서 만난 맹인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되살려 놓았다.
맹인 부부가 남산 중턱 산책길 벚꽃 아치 아래 벚꽃을 밟으며 팔짱을 끼고 소곤거리며 벚꽃 얼굴로 걷는다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벚꽃 나라를 보고 있다. 사랑으로 지핀 마음의 꽃등을 앞세우고 서로서로 부축하며 서로서로 이끌며 캄캄한 세상을 밀쳐내며 벚꽃놀이를 하고 있다
엉켜 한 몸이 되어버린 맹인부부가 두 그루 벚나무가 시방 벚꽃을 피우며 벚꽃을 흩뿌리며 벚꽃 눈을 뜨고 벚꽃 사랑을 하고 있다 눈은 떴지만 마음의 눈이 없는 사람들 틈에서 ―차옥혜, 「마음의 눈으로」
맹인 부부에게 활짝 핀 벚꽃이 보이겠는가 하는 걱정은 육체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걱정일 뿐이다. 시 속의 맹인 부부는 육체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제약쯤은 일찌감치 벗어던졌다. 그들은 마음의 눈이 열려 있음으로 해서 누구보다도 세상의 변화를 잘 살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벚꽃이 핀 사실을 알아차리고서는 벚꽃 구경을 나왔다. 맹인 부부의 얼굴에는 조금의 구김살도 없다. 시인은 그것을 “벚꽃 얼굴”이라고 했다. 맹인 부부의 얼굴이 벚꽃처럼 더할 나위 없이 화사하다는 뜻이리라. 이는 겉치레로 괜시리 한 번 입에 발린 소리로서의 미화법이 아니다. 안받침이 충분히 되고 있는 미화법이다. 두 번째 연에서 보면 맹인 부부들이 마음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서로 깊이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맹인부부는 사랑으로 서로를 지피고 있다. 곧, “서로서로 부축하며” “서로서로 이끌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캄캄한 세상”을 “마음의 꽃등”을 앞세우고, 밀치며 나아갈 수 있다. 시인은 세 번째 연에서 벚꽃나무만 벚꽃을 피울 수 있는 게 아님을 말해준다. “엉켜 한 몸이 되면”, 누구나 벚꽃나무가 되어 벚꽃을 피울 수 있고, 벚꽃을 흩뿌릴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벚꽃 눈을 뜨고 벚꽃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육체의 눈은 떴지만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벚꽃을 피울 수도 없고, 벚꽃을 흩뿌릴 수 없고, 벚꽃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데 비해서 말이다. 결국 시인은 마음의 눈을 뜬 맹인 부부를 통해서, 육체의 눈만 뜬 사람보다는 육체의 눈은 비록 뜨지 못했지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오히려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아름다운 진실을 말해 주고 있다. 차옥혜 시인은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차옥혜 시인은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관찰자로서 머물고 있다.
무색의 둥그런 선 안에 갇힌 물의 무게를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살 속에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어 세상으로 닿는 길목, 씨 하나를 심는다
겹겹의 눈빛 사이로 만상이 스러지고 찬바람의 손바닥에 얻어맞아도 해체되지 않는 그 팽팽한 표면장력, 서릿발치는 하늘 몇 장이 젖은 몸 안으로 들고 둥글게 부풀어오른 정적이 잠시 숨이 멎는다
그 어느날, 쩍쩍 입 마른 벌판의 살갗 속으로 지분지분 스며들면서 천지간 푸르러지는 여름 江, 마침내 실로폰 소리처럼 튕겨 오르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꼬깃꼬깃한 시간의 주름살을 팽팽히 다려 놓는다 나도 그렇게 작은 물방울 하나로 기스락 끝에 매달려 있다 투명한 씨방 속, 무수한 뿌리를 늘인다
둥그런 씨앗 하나가 시방 탱탱히 영글고 있다 ―신지혜, 「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다」
신지혜 시인은 차옥혜 시인과는 달리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본 사물을 말하고 있다. 물방울 하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육체의 눈 위에 마음의 눈이 겹쳐지고 있다. 신지혜 시인은 그 자신이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사물을 우리 앞에 자세히 묘사해 주고 있다. 신지혜 시인이 묘사해 보여주는 것은 너무도 섬세해서 도저히 육체의 눈만으로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첫째 연에서 물방울의 ‘속’과 ‘겉’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시인은 ‘속’과 ‘겉’ 사이에는 “무색의 둥그런 선”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의 눈으로 보면 ‘속’과 ‘겉’에 대한 구분이 어렵긴 하나, ‘속’도 있고, ‘겉’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색의 둥그런 선”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방울의 안에는 “피”가 흐르고, “뼈”가 있고, 세상으로 가는 “길목”이 있음도 볼 수 있다. 여기서 “물방울 하나”는 다름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서 숨쉬는 작은 우주임을 알 수 있다. 이 작은 우주는 다른 작은 우주로 통하는 길목도 갖고 있다. 작은 우주와 작은 우주를 이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씨”를 심는다고 했다. 둘째 연에서는 “물방울 하나”인 작은 우주가 쉽게 파괴되지 않음을 “찬바람의 손바닥에 얻어맞아도 해체되지 않는/ 그 팽팽한 표면장력”이라고 했다.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시인 자신이 곧 “물방울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기스락 끝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시인은 이 물방울 속에 스스로가 “무수한 뿌리를 늘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인 자신이기도 한 “물방울 하나”가 지금 탱탱히 영글고 있다고 했다. 신지혜 시인은 육체의 눈으로는 잘 들여다볼 수 없을 것 같은 “물방울 하나 속”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을 깨치고 있다. 결국 신지혜 시인은 “물방울 하나”라는 매우 구체적인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그 성찰된 결과를 다시 시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것처럼 수련의 입술이 떨렸다. 그때 물의 뺨이 떨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수련도 물도 그대로 꼼짝도 않고 햇빛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는지도 모른다.
밤의 공기 속에도 햇빛의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은 주홍색 뿔 모양으로 수련의 꿈속을 들락거린다. 수련은 어둠 뒤쪽에 은밀히 숨은 햇빛의 시선을 느끼며 잠 속인지 꿈속인지 모를 어렴풋한 안개 속에서 물의 귀를 건드렸다. 그때 물이 흰빛에 스며들었다. 마치 백지 위에 잉크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물과 수련이 섞이면서 잠시 무정형의 덩어리로 합쳐졌다.
캄캄한 머리를 급히 일으키는 바람에 별들이 세차게 부딪치면서 큰 소리로 번쩍였다. 수련의 연못은 사라지고 일렁거리지도 않는 흰 종이만 딱딱하게 놓여 있다. 고통스럽게 머리 속에서 반짝거리는 별들을 종이 위에 쏟아낸다. 그때 물의 귀처럼 수련의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러나 종이는 그 말들을 물처럼 반사시키지 않는다. 볼 수가 없다. 읽을 수 없는 수련의 말들이 어둠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별들도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고 식어버린 돌처럼 백지 위를 버석거리며 돌아다닌다. ―채호기, 「읽을 수 없는 수련의 말」
가끔 사람들이 연못에 ‘수련’이 핀 것을 보고 ‘연꽃’이 피어 있다고 잘못 말하는 경우도 있다. ‘수련’과 ‘연꽃’은 둘 다 수련과의 식물이다. 그래서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알고 보면 그 생김새나 특징이 많이 다르다. 연꽃은 처음 나오는 한두 개의 잎과 마지막 나오는 잎말고는 나머지 잎들이 모두 물 위로 높게 올라와 있다. 수련은 잎과 꽃이 모두 수면에 떠 있고 물 위로 많이 올라오지 못한다. 수련은 꽃대와 잎자루가 가늘고 연해서 곧게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연꽃은 수련보다 꽃과 잎이 더 크다. 연잎은 둥글고 갈라지지 않는데, 수련의 잎은 둥근 것도 있지만 말발굽 모양으로 갈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고종 때 문신인 곽예는 한림원에 있을 때 비가 오면 매번 맨발로 우산을 들고 혼자 삼지에 나가서 연꽃을 구경했다고 한다. 그만의 기이한 행동이었다. 곽예는 자신의 이러한 기이한 행동 경험을 「賞蓮」이란 제목의 칠언절구에다 담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동문선』 제20권에 실려 있다. “賞蓮三度到三池/翠蓋紅粧似舊時/唯有看花玉堂老/風情不減빔如絲 연꽃을 완상하러 세 번째 삼지로 가니/ 푸른 일산과 붉은 단장은 예와 다름 없구나/ 오직 꽃을 구경하는 옥당의 늙은이 있어,/ 풍정은 줄지 않았는데 머리털만 희었네” 곽예는 비가 오는 날 연못으로 맨발로 달려가 연꽃을 구경했지만, 정약용은 이와는 달리 연꽃 봉오리가 열리는 소리를 즐겨 들었다 한다. 정약용은 연꽃이 필 때쯤이면 새벽에 연못으로 나가 배를 가만가만 저어 연꽃 있는 데로 가서는, 배를 멈추고 어둠이 조금씩 조금씩 걷힐 때, 연꽃봉오리에 귀를 대고는 연꽃 봉오리가 열리면서 내는 가느다란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고 한다. 연꽃 봉오리가 열리는 소리는 실제로 몇 데시빌이나 될까. 정약용이 실제로 연꽃 봉오리가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정약용이 곽예와는 달리 연못가에 서서 연꽃 봉오리가 열리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하지 않고 연꽃 가까이 다가가 봉오리가 열리는 소리를 듣고자 했던 것은, 사물을 육체의 눈과 귀로만 보고 들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과 귀로도 보고 들음으로써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살피고자 한 태도를 보여준다 하겠다. 곽예는 연꽃 봉오리가 열리는 것을 눈요기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나 정약용은 오히려 연꽃 봉오리가 열리는 소리에 주목했듯이, 채호기 시인도 수련의 꽃봉오리가 열리는 모습을 눈요기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꽃 봉오리가 열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채호기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육체의 눈과 귀로 사물을 바라보고 듣기보다는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을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의 귀로 사물을 살피고자 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꽃이 핀 것을 보러 가자고 말하지, 꽃봉오리가 열리는 소리를 들으러 가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꽃의 얼굴을 본다”고 하지 “꽃이 입술을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채호기 시인은 “수련의 입술이 떨렸다” “햇빛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눈으로 사물을 성찰하는 태도가 아니라 귀로 사물을 성찰하는 태도이다. 더욱이 수련이 입술을 떨면서 내는 소리나, 햇빛이 입술을 가늘게 떨면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육체의 귀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귀로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채호기 시인은 시인다운 겸손함으로 자신은 마음의 귀가 아직은 온전히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제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을 시인은 「읽을 수 없는 수련의 말」이라고 했다. 이는 마음의 귀가 온전히 다 열리지 않아 수련의 말을 듣기는 해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3.
이 달에는 시인들이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시로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육체의 눈과 귀는 사물과 사람살이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쓰임새가 있을지 몰라도 사물과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드러내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물과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드러낸다든지, 구체적인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그 성찰된 결과를 다시 시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과 사람살이를 보고 듣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달에 살펴본 세 시인은 이 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차옥혜 시인의 경우는 단순히 관찰자로서, 육체의 눈과 귀는 열리지 않았지만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린 맹인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보여줌으로써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읽는 이들이 어렵지 않게 깨칠 수 있게 해 주었다. 신지혜 시인은 육체의 눈으로는 잘 들여다볼 수 없을 것 같은 “물방울 하나 속”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어떤지 깨치고 있다. 신지혜 시인은 “물방울 하나”라는 매우 구체적인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그 성찰된 결과를 다시 시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채호기 시인은 차옥혜, 신지혜 시인이 마음의 눈에 대해 성찰해 본 것과는 달리, 마음의 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채호기 시인은 수련의 꽃봉오리가 열리는 것을 눈으로 살피기보다는 귀로 살피고 있다. 이는 육체의 눈, 또는 마음의 눈으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살피려는 태도가 아니라 육체의 귀, 또는 마음의 귀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살피려는 태도이다. 세 시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대해서 살피고 있지만 결국은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이나 사람살이를 살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 힘썼다는 점은 한결같다. 세 시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도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과 사람살이에 대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힘썼으면 좋겠다.◑
(시인, 고려대 강사) [문학과 창작]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