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통해 본 현대인의 부재의식
진영대
*신지혜, 「빈의자다섯개」(『현대시학』 2002년 12월호) *신용선, 「문」(『문학과창작』 2002년 12월호) *김우연, 「겨울 숲」(『현대문학』 2002년 12월호)
1.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시란 무엇인가. ‘고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플라톤의 시학 이후,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물음에 대하여 한번쯤 답안지를 써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답안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아무도 틀린 사람은 없다. 모두 시험에 통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될 수 있지 않았던가.’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정답으로 간주되어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이 같지 않다고 해서 모두 옳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도 이 답안지에 대해서 채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옳은 답이 되어버린 것뿐이다. 간혹 채점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답안지에 매겨진 점수에 대해서 승복할 시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 교과서적인 답안지를 열거하면 시란 ‘마음의 소리’ ‘삶에서 얻은 감동을 나타낸 글’ ‘시는 이미지다’에서부터 ‘정서적 등가물이다’ 하물며 시는 똥이다, 시는 물이다 한들 누가 시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많은 정의를 한들 대체로 ‘시는 마음 속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즉 ‘저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저의 무엇을 알아달라는 고함인지에 대해서는 별개라 하더라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대답이 정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효구는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글에서 네 가지를 열거하였다. 첫째, 모든 존재를 해방시키는 해방의 전령사이다. 둘째, 심미적 세계를 꿈꾸는 대표적 양식이다 셋째, 인간의 영적 능력을 깨우는 일이다 分? 시인이야말로 고급한 유희를 즐기며 그 고급한 유희를 전파하는 사람들로서 시는 언어의 놀이이자, 상상력의 놀이이고, 사색의 놀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노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거의 맞는 말이다. 삶의 궁극적 목적이 ‘나는 나이다’ 라고 자신있게 외치고자 하는 데 있고, 시는 도구화되고 억압된 모든 존재를 해방시키는 해방의 전령사라는 데에 나 역시 동의하지만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시는 언어의 놀이이자, 상상력의 놀이이고, 사색의 놀이라는 데 있다. 필자는 요즘, 우리 시가 노는 일에 대체로 서툴다는 생각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거의 제한이 없다. 70년대를 지나면서 기존 틀에서 벗어나려는 많은 시인들의 노력과 시도를 거치면서 이제 그 형식이나 시어의 선택에서 더 이상 구속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형식면만 본다면 ‘시는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모두 시다. 모두 시이기 때문에 모두 시가 아니라는 역설이기도 하다. 그나마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남아서 시와 소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시는 운문이다. 서정성이다.’ 하는 것도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실제로 시쓰기에서 시의 산문성이나 서사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부정하기는커녕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유효하게 사용되기는 하지만 시의 운문성이나 서정성은 이미 시효가 지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시는 놀이라는 데 주목한다고 하였다. 노는 데 무슨 형식이 필요하겠는가’ 한 판 굿판이요, 춤판이라는 말이다. 노래판이나 춤판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용하는 악기가 언어요, 춤을 추는 주체가 영혼으로 영각(靈覺)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놀이라는 것이다. 영각을 통해서건 시각, 청각을 통해서건 놀이에는 흥이 있어야 한다. 흥이 없으면 울음판이라도 있어야 한다. 어릿광대라도 되어야 한다. 구경꾼을 의식하고 논다면 흥이 날까.’ 났던 흥도 깨지기 마련이다. 노는 데는 구경꾼을 모아놓고 노는 것이 아니다. 놀다보면 흥이 오르고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것이다. 놀다보니 구경꾼이 끼어들어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시와 산문을 구분하는 요소 중에 이런 구경꾼을 모아들이는 흥이 하나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독자를 의식하지 말고 신나게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은 단편들을 늘어놓았다. 그럴 때 돌아섰던 구경꾼들(독자)도 다시 구름처럼 몰려들고, 어느 사이 서로 어깨를 끼고 덩실덩실 걸지게 한 판, 영혼의 놀이판이 벌어지지 않을까.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눈치보지 않고 당당하게 노는 시인을 기다려보는 것이다.
2. 시에 나타나는 현실인식
한 달간 발표되는 시는 상상을 초월한다. 원고의 부탁을 받고 가능하면 많은 시를 읽어보려고 했지만 애초부터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건대 발표된 모든 시를 읽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한정된 범위에서, 나름대로 다시 읽고 싶었던 시를 독자들과 함께 읽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소개하려는 것이다. 신지혜 시인의 「빈의자다섯개」는 현대인의 부재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인에게 있어 가족이란 이미 공동체가 아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생활공간에 불과하다.
그식탁옆에빈의자여섯개가있었다아무도앉지않았다아마나를초대한것은그들이었을지몰라나는다가가한의자에조용히앉아커피를마신다아무도말하지않았다다섯개의자에앉은그들이보이지않는,커피를마신다무언의얇은膜과膜사이엔오직직감만이팽팽히당겨졌다빈의자다섯개앞에다섯개의커피잔이보이지않는다참,반가웠어요내가일어섰을때그들도따라일어섰다공기다섯무더기가일제히뒤틀리면서소용돌이쳤다내귓가에소음이들렸다그때였던가,잠시투명한공기막사이사이,단단한적막의얼굴들펄러덕,스쳤다빈의자다섯개 ―신지혜 「빈의자다섯개」 전문
이 시의 장치는 매우 간결하고 시의 형태에서도 적절하다. 가족들을 출근, 등교시키고 여자는 그들이 남긴 설거지를 시작하였을 것이다. 여자가 집안일을 마치는 시간은 남편의 출근시간만큼 정확할 것이다. 여자가 거실 바닥 청소까지 마치고 말끔하게 치워진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었을 것이다. 아직 가족들의 따뜻한 체온이 남아있는 식탁에 앉아 그들을 느끼며(사실은 커피향을 느끼며)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들 것이다. 어느덧 여자는 커피향을 느끼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중독되어 하루에도 몇 번 식탁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즐기게 되었을 것이다. 6인용 식탁을 사용하는 가정이라면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을 상상할 수 있다. 일상처럼 반복되는 일은 매우 힘들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어느날 문득, 여자는 “적막의얼굴들펄러덕,스치는”것을 보았을 것이다. 사실 여자가 본 것은 “적막의얼굴들”이 아니라 주방의 창문을 열어놓았던가 하여 바람에 커튼이 펄럭이는 그림자였을 것이다. 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시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쓰는 것인가, 아니면 얻는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를 얻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으로 정하여 버렸다. 여기에 대해서는 적절한 기회가 되면 좀더 언급하기로 하고 보류해 둔다. 다시 돌아와, “적막의얼굴들펄러덕,스치는” 순간 지금까지 여자를 휩싸고 있던 막연한 불안감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행복해, 나는 행복해야 해’ 하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줄 것이다. 여자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식탁에 앉아 식구들은 “무언의얇은膜과膜사이”에 가려져 “아무도말하지않았다” “공기다섯무더기”가 무겁게 짓눌렀다. 어제까지의 일상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여자는 이제부터 불행해지거나 현명해질 것이다. 이제부터 혼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기대어 살았거나, 부축하며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법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신지혜 시인이 사람들을 식탁에 불러다가 앉혀놓고 화해를 갈구하고 있는데 비하여 신용선 시인은 “혼자가 되기 위해/사면에 벽을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갈 문을 만든다”.
사람들은 혼자가 되기 위해 사면에 벽을 세우고 그 안으로 들어갈 문을 만든다.
벽을 따고 문을 만든다.
바다에서 돌아왔을 때나 미처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도 사람들은 무언가를 닫기 위해 문을 사용한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누가 외출을 하는가. 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문은 없다. 바깥에서 들어가 그것을 잠그기 위해 사람들은 문을 만든다. ―신용선 「문」 전문
‘문’을 해석하는 방법은 크게 ‘들어가’거나 ‘나가’는 것이다. ‘문’은 시인이라면 누구나 소재로 삼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한다. 소설가가 연애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소재라는 말과 통한다.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선 시인의 ‘문’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일반적인 해석을 더욱 확장시켜 “무언가를 닫기 위한 문”으로 읽어냄으로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아예 “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문은 없다”고 선언한다. 모든 동물은 집을 만든다. 하지만 문을 만드는 동물은 사람이 유일하다. 소유욕이 그만큼 강하고 집착이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랜 시력이 아니고는 얻기 어려운 시라는 생각이다. 현실에서 성공을 한 사람이나(바다에서 돌아왔을 때나), 실패한 사람(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도) 모두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세상을 위해 단절을 꿈꾸지만 결국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외출을 하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신용선 시인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바깥에서/ 들어가 그것을 잠그기 위해/ 사람들은/ 문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데 비하여 다른 세상의 문을 서둘러 열고 들어가 “텅 빈 숲에 가닿고 싶었다”는 다른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김우연 시인의 「겨울 숲」이 그것인데 얼마나 현실 세상이 힘들었으면 차라리 “빨리 늙어” 산에 묻히고 싶다고 하였을까. 표면적으로 절망에 가깝지만 강한 희망을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죽고 싶다는 말은 살려달라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아파트에서 내다보면 길은 저 혼자 두리번거리며 불암산을 오른다 낮달이 우두커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가끔은 유익종의 노래가 이성복의 시보다 더 아프게 들렸다 봄이면 나무들이 초록으로 각혈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지만 세월은 그렇게 시 한 편 없이도 잘 흘러갔다 몇 사람은 나를 떠나갔고 나는 또 몇으로부터 떠났다 안녕, 그리워, 사랑해 따위의 사람들의 언어는 거의 전부가 아프다는 뜻으로 쓰였다 지하철에 한 번 오를 때마다 빨리 늙어가고 싶은 몸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닫을 뿐이었다 누군가 힘들게 나에게서 낙엽져 내렸고 나는 그 낙엽을 밟으며 텅 빈 숲에 가닿고 싶었다 ―김우연, 「겨울 숲」
40대의 실직 가장이라면 어울리는 배경이 될만한 시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길은 어딘가로 모두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길은 사람들이, 혹은 시인이 이미 살아온 흔적에 불과하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까지는 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휴일이면 불암산으로 등산도 하고 가끔은 불륜을 꿈꾸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제 시는 따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세월은 그렇게 시 한 편 없이도 잘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다. 어느날 불어닥친 실직, 혹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이 시인에게도 엄습하였을 것이다. 모두 일터로 나간 평일에 “저 혼자 두리번거리며 불암산을 오르”는 길을 아파트에서 내려다볼 사람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거나 불쌍한 사람이다. “사람들의 언어는 거의 전부가 아프다는 뜻으로”밖에 들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족들 보기가 민망해서 밖으로 나오지만 벌써 몇 바퀴 순환선 지하철을 타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도 서서히 시인에게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누군가 힘들게 나에게서 낙엽져 내렸고). 이 때 시인은 죽음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현실의 자신을 불암산에 묻고 돌아온 시인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을 것이다. 오래 잊었던 시를 다시 쓰고 있을 것이다. “시 한 편 없이도 잘 흘러가”는 세상이 아니라 시가 전부인 세상에서.
3. 시에는 언제나 희망이 묻어 있다
이 달에 읽은 세 편의 시는 의도적으로 편식하였다. 작품을 평가하는 지면이 아니라는 생각이었고 가장 보편적인 현대인의 부재의식에 대하여 다른 이들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문득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타인으로 보이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마네킹으로 보일 때,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얘들아 어디 있니’ ‘너 왜 말이 없니’ 자꾸 시비를 걸어 다시 예전으로 돌려놓으려 하고, 또 다른 이는 아예 방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꺼린다. 악착같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런 세상 미련 둘 것 없이 죽어버리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어리게도 보이고, 고집스럽게 보이고, 비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자체가 아직 세상에 대하여 사람들에 대하여 희망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는 이 세상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희망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가’ 이제 내 몫으로 남겨둔다.◑ (시인)
<문학과 창작, 200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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