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제목[현대시학] 새해 아침에 쓰는 산문/ 해외에서- 나의 우다나를 위하여/신지혜, 2004년 1월호,2019-07-29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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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에 쓰는 산문/해외에서



나의 '우다나'를 위하여



신 지 혜  시인




 이제 새해다. 눈발이 흩날리는 밴숀파크를 걷는다. 참나무와 히말라야시다들이 미동도 없이 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한때 푸르렀던 이파리를 품어주었던 참나무들이, 빈 나뭇가지에 흰 눈발을 앉히고 있다. 그간 말없이 스며들었다 빠져나간 적막과, 우렁우렁 천지를 뒤흔들던 우레소리는 또 얼마나깊었던 것일까. 눈발 하나 하나도 제각기 각자의 낭떠러지를 헤아리며 가만가만 허공을 내딛는다. 

 지난 한해 동안 알게 모르게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이 역사를 다녀갔다. 격변하는 지구촌의 덧없는 문패들이 속수무책으로 덜컹거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명분 없이 귀중한 생을 잠깐, 틔우다 무참히 스러져 갔다. 군데군데 함몰되고 으깨져버린 이 지구의 비참한 상흔을 과연 그 누가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아픈 흔적들의 내압이 이세상의 물결을 좀더 나은 차원으로 밀어가고 있을는지 모른다고 내심 안타까이 위안해볼 따름이다. 하지만 무지와 욕망의 칼자루 앞에서도 시간의 무량한 흐름은 이토록 우리의 목전에 화사한 새해를 또다시 열어놓질 않는가.

 돌아보면 어느 시대건, 술렁이지 않는 격변의 시대는 없었으며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극도의 갈망과 고통의 수렁이었다. 이 모든 이원대립적인 실상을 그 자체로 일원성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술렁거림의 문화인류적 파도는 한 시대적 굴곡운동을 하며 물리적 탄성을 번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이러한 냉엄한 역사적 흐름이 우리 앞에 선과 악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소멸시키고 있는 바로 이곳이야말로, 곧 천국과 지옥의 그 교차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밴숀파크 중앙의 작은 호숫가를 끼고 걷는다. 서너 마리의 거위들이 물그림을 그리며 물결위에 조용히 앉아 흔들리는 것을 본다. 그들도 눈발을 헤아리는 지 동공 가득히 흰 점이 찍힌다. 적막이 수위를 높였다 줄였다 한다. 바로 그때였던가. 온 몸으로 돌진하여 허공을 터치하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돌연 자욱한 겨울하늘에 쩡! 뇌관 터지는 소리, 숨통이 터지는 소리. 내리던 눈발이 잠시 멎었던 것 같다. 저 새는 온몸으로 소리 한 알을 열어 눈내리는 고요를 작파하는가. 나도 모르게 내 두 눈과 귀가 번쩍 트인다.

 나 자신을 곰곰 돌아보게 만든다. '시인이란 신과 인간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조화롭게 이어주는 존재이며, 신의 번갯불을 쐬며 제비처럼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휠덜린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시인이란 신과 교감하며 인간사이의 아득한 거리의 촉매자적 존재라면, 그 수단인 언어 역시 신성한 영체와도 다름없으리라. 그 언어 또한 살아있는 파동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크던 작던 파장을 미칠 것이라 나는 믿는다. 곧 어둠의 언어는 어둠의 파문을 던지게 마련이고 밝은 언어는 밝음을 파동시킬 터이기에. 나 또한, 진지한 성찰없이 언어를 방생하여 내것이 아닌 이 세상을 함부로 오염시키지 않게 되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영원한 화두인, 뼈저린 '절차탁마'의 거듭나기로 어느날 갑자기 숨이 멎을 듯 천둥 벼락치는 시의 우다나와 조우하여 온전히 내가 작파되기를, 소망해본다.



*밴숀파크-미동부 뉴저지 주 버겐 카운티 소재.




-[현대시학 2004년.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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