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15 22:57 | HIT : 5,437
거주 증명서
신 지 혜
지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침묵으로부터 왔다. 아무리 모질게 아파도 그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찬 겨울 하늘, 춤추며 혼자 발을 내리는 눈송이. 시린 햇빛에 등 기댄, 우두커니 풀밭에 앉아있는 홈리스 고양이. 철조망아래 그림자 떨구고 바알간 발가락으로 잔뜩 철조망 움켜쥔 괭이 갈매기. 내게 안부 묻고 넓은 등 보인 칸나 꽃들. 그들은 모두, 떠나갈 때 자신의 그림자 말끔히 거두어 간다.
누가 내 존재를 갑자기 불심검문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내 그림자 한 장 꺼내 제시할 것이다.
'이 지구별 거주 증명서 한 장'
나는 시시때때로 쓰러지는 내 그림자 일으켜 세우며 너덜너덜 헤진 그림자 한 벌 다시 꿰매어 입고 마지막 안간힘 쓰기도 하였다.
내 그림자는 단 한 벌뿐이다. 내 육신으로 만든 단 하나의 인장이며, 이 지구별 유일무이 거주증명서인 것이다.
-계간[시평]여름호-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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