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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행진/ 신지혜.................계간『서시』2008년. 가을호2019-07-1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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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




신지혜



후지 사과에 칼집 넣었는데
그만 중심이 시꺼멓게 다 썩었던 것이다
벌레가 검은 동굴을 팠던 것이다
토실토실한 흰 벌레가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사과 속 벌판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과육의 향긋한 길 따라
천지사방 흘러 다녔던 것이다
처음부터 하늘과 땅 그런 것 있기나 하리,
그 외피가 둥근 지 각진 지 모르고 그저
작은 알집같은 그 사과 속에서 바람의 춤
터득하며 밀려다녔을 것이다
흰 속살에 뺨 비비며 혼자가 마땅한 세계라고
외로움 그런 건 도무지 알지도 못하며,
온전히 썩어가는 중심 터전이야말로 제 본향이라고
그저 앞만 보고 밤낮
묵묵히 집에서 집으로 행진했던 것이다


과도를 대자마자 그의 잘 썩은 꿈이 쩍 쪼개지고
삶의 물리가 터져 버린 것이다 그것이 허공에 매달린
사과라는 이름의 별이었다는 것,
그가 그렇게 다른 이차원의 벌어진 세계로 툭.
목숨을 이전했던 것이다




-계간『서시』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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