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제목신지혜 시집,[밑줄]"안개의 국적, 코즈모폴리턴의 경전"-박현수<시인.경북대 교수>2019-07-17 19:28:24
작성자
2007·07·14 03:44 | HIT : 4,475 | VOTE : 548


해설


안개의 국적, 코즈모폴리턴의 경전

 

박현수(시인, 경북대학교 교수)

 

신지혜 시인의 시를 읽을 때 눈이 밝은 독자라면 아주 은밀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녀의 시집은 요즘 시인들에게서 발견하기 힘든 특별한 상상력을 읽는 기쁨, 몇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에 누군가 그 내용을 슬쩍 비치기만 해도 마치 오랜 벗이나 된 듯 저절로 악수를 청하게 만드는 그런 기쁨을 준다. 이것은 신비주의 경전을 은밀하게 읽는 기쁨이다. 그녀가 발견한 경전을 아무데나 펼쳐보자.

내가 현관문을 밀고 나가자,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저편 우주 끝에 가 닿는 결 무늬, 다시 밀려와 내 몸 속을 통과했네 내가 휘적휘적 길 걸어갈 때, 몇 겹의 공기가 푸드득 찢겨 너풀거렸네 이따금씩, 휘둥그레진 그 눈알 속에 수천의 내 얼굴 촘촘히 박혀 있었네 문득문득 저편, 파스텔의 전생들이 흘깃흘깃 나를 바라다보네

타박타박 걷다가 뒤돌아보면 공기 소용돌이가 나를 따라오네 어쩌다 올이 풀린 공기알이나 찌그러진 공기 한 알도 누군가 재빨리 수선하네 노오란 햇살의 실밥들이 자욱이 흩날리네 길 앞, 저쪽이 접혔다 펴질 때마다 우주 건반이 루루 경쾌하네 나는 거리의 악사처럼 길을 가슴에 껴안고 연주하네
-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전문

“내가 현관문을 밀고 나가자,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첫 구절에 당황할 것이다. 시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경전을 읽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자명한 사실이 어디 있겠는가. 자명하다는 것은 너무나 뻔해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이 경전은 한 구절 한 구절 손으로 짚어 읽어야 한다. 둘째 손가락을 펴서 한 번 따라 읽어가자.
현관문을 열면 그 문을 뒤에서 받치고 있던 수많은 공기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들은 필연코 밀리고 밀려 수많은 연쇄적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 파문은 아득한 골목 저편까지 까마득하게 밀려나갈 것이고 그러면 그 사이에 가득한 공기들은 아코디언처럼 첩첩이 접혀지고 말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파문은 밀리고 밀려 마침내 우주 끝에 닿으면 다시 밀려와 문을 연 자신의 몸속을 통과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길을 걸을 때도 그러하리라. 걸어가면 공기는 유선형 유람선이 나아갈 때처럼 두 갈래로 찢어지리라. 깜짝 놀란 공기들 속에 수천의 내 얼굴들이 보일 것이다. 공기들은 수많은 내 전생의 다른 모습일 테니까.
그리고 길을 걸어가다 보면 당연히 유선형 배꼬리에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공기 소용돌이가 자신의 꽁무니를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 그때 짓눌린 공기방울이야 우주적 치유력으로 다시 제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내 앞에 아코디언처럼 접혔다 펼쳐지는 우주 건반에서 신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며, 그렇다면 앉고 일어서고 걷고 멈추는 나의 생 자체가 아코디언 연주가 되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제 경전의 몇 절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보았다. 어떤가, 놀랍지 않은가. 현관문을 열면 그 문에 밀려 아득한 골목이 아코디언처럼 접혀진다는 이 기막힌 상상력은 우리 시에 낯설면서도 가치 있는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우주적 교감으로 가득한 이 신비주의적 비전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 놀랍다. 그것은 고차원의 사유가 현관문 여는 일처럼 친근한 대상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지혜 시인의 장점은 이처럼 신비주의적 사유를 일상화하는 데 있다. 아니, 일상의 신성화라 하는 것이 옳으리라. 이 세계는 애초부터 신성하다. 그러므로 신성하게 경배해야 한다.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신성한 일인지 다음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단전에 숨 한번 멈추고
여백이 꽉 찬 흰 화선지 위에
듬뿍 묻힌 먹물을 꾸욱 누르는 듯 싶더니
흰 우주 적막을 가늘게
찢으며 꽁꽁 숨었던 난초 잎 하나 툭, 트인다

드디어 난초 잎 하나 고개를 든다
얇은 화선지 음지에서
서로 엉키고 설켰던 구부러진 사족들,
날렵하게 이리저리 삐쳐 오른다

천 길 절벽에 이르러서는
일직선의 팽팽한 몸이 망설임도 없이
난창, 휜다 품 넓은
대기가 단숨에 넙죽 받아 안는다
-[난을 치다] 부분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지기의, 부음을 들었다

그가
밥그릇 하나를 비웠다
하루 세끼 신성한 의식을 엄숙히 집전하던 그는,
세상 골목을, 지친 그림자 끌고 다니며 머릴 조아렸다
결코 넘치는 법 없던 그의 밥그릇,
따뜻한 밥이 담겨지는 동안은 그래도
늘 행방불명이던 삶이 증명되었다

이제, 식탁 위엔 그의 수저가 없다

그는 지상 최대의 소신공양을 끝내고
자신의 그릇을 온전히 다 비워냈던가

움푹 파인 빈 그릇에
웃자란 적막이 봉분처럼 수북하다
-[텅 빈 밥그릇] 전문

화선지 위에 난을 치는 일은 예술적인 행위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은 이것이 얼마나 신성한 행위였는가를 시를 통해 깨닫게 해준다. 화선지 위에 붓을 대는 일은 일상적이지만 그 일상을 꽃피게 하는 것은 감춰진 차원의 힘이다. 난 치는 사람이 그 난을 꽃피우고 잎 트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그 힘의 상호작용으로 “흰 우주 적막을/ 찢으며 꽁꽁 숨었던 난초 잎 하나”가 피어나는 것임을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인간의 세계는 또다른 차원의 세계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지기의 죽음을 다루는 시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하루 세 끼 밥 먹는 일은 “신성한 의식”이다. 그래서 밥숟가락을 놓고 밥그릇 하나를 비우는 일은 “지상 최대의 소신공양”일 수밖에 없다. 이 소신공양은 누구에게 바치는 공양이란 말인가. 빈 그릇에 봉분처럼 “웃자란 적막”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가 밥그릇을 비워내는 순간 그만큼 쌓이는 적막의 세계가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인가. 그래서 죽음조차 한 개체의 종말로 끝나지 않고 또다른 세계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신성할 수 있다. 평면으로 닫혀 있는 세계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전제하고 있는 점이 신지혜 시의 특징이다.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은 스케일이 큰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녀의 시적 사유의 단위는 지상의 자로 잴 수 없는 우주적 척도이다. 현관문을 여는 일조차 우주적 단위로 재는 것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녀의 이런 스케일은 시집 곳곳에 드러난다.

백년 후, 난 이곳에 없을 것이다
유령이 될 것이다
이 행성에 왔던 흔적도 없이
공기 문 드르륵, 열고 나갈 것이다
그러면, 그 쪽은 此岸이고 이쪽은 彼岸이 될 것이다
- [즐거운 고스트] 부분

일없이 서성이던 바람에 묻어 유랑하던 한 방울,
저 우주 변방을 돌고 와, 지친 몸
강물 위에 눕힌다 부서진 살과 뼈의 와해도 없이
헤어질 듯 또다시 껴안는다
처연히 바다로 간다
- [나는 물이다] 부분

이런 스케일의 상상력은 구체적 설득력을 지니지 못할 경우 자칫 황당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다. 마치 실패한 숭고(崇高)가 어색한 과장(誇張)으로 타락해버리는 경우처럼. 스케일이 큰 상상력이 유지되려면 시 전체에서 언어들의 수준이 고르게 유지되어야 하며, 그 속에 구체적이고도 절실한 설득적 요소가 들어있어야 한다. 신지혜 시인의 시는 이런 위험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그 스케일 큰 상상력을 당당하게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그녀가 죽음을 한 마디로 “공기 문 드르륵, 열고 나갈 것”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 시적 맥락에서 하나도 갑작스럽지 않으며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물방울과 관련하여 “우주 변방”을 말할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다.
스케일 큰 상상력이 허황되지 않게 해주는 힘은 이 세계를 세밀하게 읽을 수 있는 치밀한 정신과 성실성이다. 그녀는 밑줄을 그으면서 이 세상을 꼼꼼히 읽는 시인이다. 그녀가 물방울 하나를 읽는 것을 지켜보자.

무색의 둥그런 선 안에 갇힌
물의 무게를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살 속에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어
세상으로 닿는 길목, 씨 하나를 심는다

겹겹의 눈빛 사이로 만상이 스러지고
찬바람의 손바닥에 얻어맞아도 해체되지 않는
그 팽팽한 표면장력,
서릿발 치는 하늘 몇 장이 젖은 몸 안으로 들고
둥글게 부풀어 오른 정적이, 잠시 숨이 멎는다

그 어느 날,
쩍쩍 입 마른 벌판의 살갗 속으로
지분지분 스며들면서 천지간
푸르러지는 여름 江,
마침내 실로폰 소리처럼 튕겨 오르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꼬깃꼬깃한 시간의 주름살을 팽팽히 다려놓는다

나도 그렇게 작은 물방울 하나로
기스락 끝에 매달려 있다
투명한 씨방 속, 무수한 뿌리를 늘인다

둥그런 씨앗 하나가 시방 탱탱히 영글고 있다
- [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다] 전문

그녀는 물방울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읽어낸다. 팽팽한 표면장력으로 이루어진 “무색의 둥그런 선 안”에 피와 살이 있고, 하늘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씨앗이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으로 흘러들어가 마른 벌판의 살갗을 촉촉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조그만 물방울이 세계로 떠나는 여정을 독자가 놓치지 않게 시인은 투명하게 이정표를 세워놓고 있다. 그리고 그 물방울이 곧 자신임을 잊지 않는다. 시인에게 이 세계를 읽는 일은 곧 자신을 읽는 일이기도 하니까. 이처럼 신지혜 시인은 하나의 대상이나 순간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세밀화 화가처럼 세상을 읽는다. 그녀에게는 우주를 읽는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으로 다음 시를 들고 싶다.

길 한 페이지 열어볼까
-발자국뿐이군
하늘 한 페이지 열어볼까
-쏟아져 내리는 동그란 새알들
바다 한 페이지 열어볼까
-일만 오천 구비 푸른 물살의 완벽한 뼈대
대지 한 페이지 열어볼까
-수천 년 전 해골들이 푸른 인광을 내뿜는다

우우, 나는 지금
책장에서 꺼내든 낡은 시간첩을 읽고 있다

그때도 비바람 불고 눈발 몰아쳤던가
그때, 어느 길목어귀에서 바라보았던 먼먼 미래가 바로
이 시간인 것일까 그때,
넋 잃고 바라본 먼먼 지평선이 바로 여기쯤일까
그때 출발한 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머물고 있다

나는 다시, 미완의 秘書를 수천 년 전 제자리로
말없이 꽂아놓는다 서점 문을 나서자
책 속의 길들이 어느새 문 앞에 당도해있었다
- [Barnes & Noble 서점에서] 전문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저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어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 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 [밑줄] 전문

우주는 책이다. 그녀는 예언자처럼 다른 사람은 절대로 읽을 수 없는 숨겨진 문자를 읽는다. 길, 하늘, 바다도 페이지를 열어보는 비전의 책이다. 그러나 아직도 읽어야 될 부분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고, 그녀가 읽음으로써 완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주라는 거대한 책은 “미완의 비서(秘書)”이다. 그녀에게는 읽을 것이 너무나 많다. 물방울, 음반, 달, 대문, 공기, 재두루미 등 모든 것이 금강경처럼 하나의 경전이고 그 속의 페이지다. 그런 그녀가 빨랫줄 읽기를 놓칠 리가 없다. 그녀가 아니라면 그로부터 “본시부터 비어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임을 누가 읽어낼 것인가.
그러나 신지혜 시인은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이력을 보고서야 알았지만 그녀는 코즈모폴리턴이다. 서울에서 나서 지금 뉴욕에 살고 있나 보다. 그는 뉴욕에 살면서 미국과 한국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한국에서 시를 쓰는 사람에게 나쁜 선입견을 주기 쉽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그런 선입견을 완전하게 깨어버린다. 그녀의 시는 대리석 조각처럼 단단하고 또한 잘 다듬어져 있다. 그것은 복수적인 언어권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부딪치는 좌절과 고뇌를 적극적으로 극복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이력이 그녀의 시를 더욱 빛을 발하게 한 바탕이 된 듯하다. 그녀는 여러 겹의 세계를 안개처럼 뚫고 때로는 스스로 안개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를 우주적 차원에서 폭넓고도 자세하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인종의 색, 편견의 경계를 넘나드는 코즈모폴리턴, 그녀의 모습은 다음 시가 잘 보여준다.

맨해튼
타임스퀘어 앞에서 내 발걸음 멈춘다
다인종 색색 얼굴들이 내 곁을 지나간다
한때 내 억겁 전생이었을 사람들

이제 나를 황인종이라 부르지 마라
나는 한때 흑인이었고 백인이었으므로
色과 色의 경계도 없이 국적도 없이
무한 시간의 구멍을 통해
자유자재 생을 왕래하였으므로

이제 나를 한 이름의 감옥에만 가두지 마라
나는 한때 쿠푸였고 투탕카멘이었고
셀리템플이었고 許黃玉이었다

이제 나를 지구인이라 일컫지 마라
나는 수억만 년 전 밤하늘 은하계 돌고 돌아
마침내 이 지구에 내려선 우주인이므로

저 도심 불빛 속 끈끈히 엉겨붙는,
인파 한가운데 고요한 시선을 꽂아보면 안다
얼핏 현란한 색의 계보 아래 깔려있는
천연색 밑그림들

나 色의 無窮 두루 넘어
이제 마악 이곳에 당도했다

나 한 철책 안에 가두지 마라
- [色의 경계를 넘다] 전문

코즈모폴리턴이기 때문에 그녀의 인식 속에서 주체는 안개이자 아바타일 수 있다. 시 속에 안개나 물방울, 허공 등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느 한 곳에 얽매일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여러 겹의 세계에 놓인 주체는 실제의 그녀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이다.

 나는 뿌리 없는 안개,

 본래 형상을 맺은 적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이 땅 끝에서 저 땅 끝으로 빗발치듯 흐르고 자맥질 치다가 형체도 냄새도 없는 흰 가시넝쿨 무성히 자라 올라 무엇 하나 묶는 것 없이, 묶은 것도 없이, 오직 한 올만 톡 잡아당겨도 스르르 풀어져버리는 幻이 있을 뿐

첫새벽, 밴숀파크 안개 속을 요철 더듬듯 짚어가는 노인들과 이미 안개 맛에 길들여진 늙은 개들이 안개 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나 안개를 조심하라 솜사탕 같은 부드러움이 네 목을 조일 때 있다 부드러운 안개 협곡으로 흡반처럼 빨려들어 영 돌아오지 못한 소문들… 그러나 겁내지 마라 안개는 절대 동서남북 구획을 나누지 않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는다 오직 제 홀로 자라 올라 말없이 흐드러졌다가 흔적 없이 거두어 갈 뿐, 네 몸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홀홀 빠져나가는 비법을 너는 백발의 늙은 안개로부터 전수받게 될 것이다

 그런 짙은 안개 속에선, 그 누구의 치부도 드러나지 않는다 네가 안개를 만지려고 손을 뻗으면, 다만 네 손은 허공을 스칠 뿐이다 이미 너도 역시 안개의 후예이므로 정신과 육체의 알리바이가 남지 않는다 모든 궤적이 마야처럼 일순 사라질 뿐이다
- [안개파크] 전문

“나는 뿌리 없는 안개”라고 했을 때, 이것은 여러 겹의 세계를 살아가야 되는 이주민 의식의 반영일 수 있으며, 동시에 근원적으로 하나의 완결된 주체가 있을 수 없다는 우주공동체적 주체 의식의 반영일 수 있다. 사실 전자의 구체적인 정황이 있기에 이 시의 울림이 더 커진다. “본래 형상을 맺은 적 단 한 번도 없”는 것은 구체적인 시인이면서 동시에 인간 그 자체이다. 여러 겹의 세계를 거쳐 온 것은 이주민뿐만 아니다. 인간을 형성해온 이 모든 것들은 몇 천 겹의 우주를 지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어디에서 맺은 형상이 진정한 형상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진정한 차원에서 볼 때 우리의 존재란 “한 올만 톡 잡아당겨도 스르르 풀어져 버리는 환(幻)”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이 세계에서 모든 궤적은 마야이며 아바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지혜 시인의 시는 이런 의식을 낯설지 않게 풀어내면서 삶에 대한 인식의 폭을 더욱 확장시켜 준다. 앞으로 이 시인의 사유가 어떤 차원으로 더 넓고 깊어질지 정말 궁금해진다.
모처럼 좋은 시를 만나서 기쁘다. 우리 시의 넓이와 깊이에 도움이 될 시집이 한 권 묶이게 된다니 참으로 다행스럽다. 어디 저 깊은 동굴 속 돌상자 속에 담겨 있다가 갓 발견된 코즈모폴리턴의 경전, 이제 세상은 한바탕 소란스러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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